폭풍 다음에 불

존 홀러웨이 · 사회과학/인문학
4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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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게 느껴질 정도로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시대에 존 홀러웨이가 에른스트 블로흐를 이어 희망의 가능성과 원리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그는 우리가 화폐라는 특유한 역사적 형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이 엄청난 고통, 파괴, 팬데믹, 전쟁, 기후위기, 요컨대 멸종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지만 그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며 그것을 넘어서는 희망의 잠재력이 실재하는바, 그것이 풍요(richness)임을 강조한다. 오늘날 자본의 가상화와 부채의 확장은 비복종적인 무리(rabble)에 대한 두려움에 기초한 것으로서, 이 화폐-자본-이윤의 사슬이 실제로는 지극히 취약함을 보여준다. 오늘날 희망은 이 취약한 화폐-자본-이윤의 사슬에서 풍요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화폐는 가두지만 풍요는 넘쳐흐른다.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크랙 캐피털리즘』을 잇는 획기적인 삼부작의 이 마지막 책에서 저자는 반자본주의와 반정체성주의를 융합하고 희망을 정치경제학 비판과 혁명이론의 핵심 속으로 가져온다. 그것은 우리 자신 속에서 희망의 힘을 찾아 그것을 존엄한 혁명적 분노, 이성적 희망으로 발전시키자는 저자의 간절한 제안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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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역자

목차

한국어판에 붙이는 서문 10 머리말 : 저 기차를 멈춰라 20 1부 분노-희망-풍요 1. 오늘, 어느 날. 24 2. 다시 시작하자.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에서. 가둠에서가 아니라 넘쳐흐름에서. 27 3. 아니 오히려 적대에서, 투쟁에서 시작하자. 32 4. 괴로움에서, 야누스에서 시작하자. “모자라!”에서 시작하자! 우리가 죽여야 할 히드라에서 시작하자. 36 2부 우리는 희망을 다시 배워야 한다 5. 다시 희망을 배울 때다. 42 6. 희망을 배우는 것은 희망을 생각하기를 배우는 것이다 : 이성적 희망. 45 7. 희망은 정체성을 넘어서 나아간다. 49 8. 우리의 희망은 부재가 아니라 절규에서 시작된다. 57 9. 절규는 우리를 부정적 방향으로 이끈다. 60 10. 부정적인 사고를 넘어서 : 안에서-대항하고-넘어서 사고하기. 79 3부 역사성 11. 대항-희망은 역사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88 12. 역사성은 역사적 유물론을 의미하지 않는다. 95 13. 파멸을 향해 우리를 데려가는 기차라는 거대서사. 이것은 깨져야 할 서사다. 100 4부 주체 14. 희망은 희생자를 위한 것도, 영웅을 위한 것도 아니다. 104 15. 풍요가 혁명적 주체다. 113 16. 잠재된 풍요에 귀를 기울여라. 123 17. 다시 귀를 기울여라 : 거기에 더 깊은 수준의 잠재성이 있다. 127 18. 모든 것을 뒤집어라, 자본가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라. 134 5부 객체 : 화폐 19. 희망은 객체에 대항하는 주체의 운동이며 속박에 대항하는 파열이다. 146 20. 파괴 사슬의 연결고리들은 끊기 어렵다. 175 21. 속박의 약점은 형태들 간의 연결이 아니라 그것들의 내적 적대에 있다. 182 22. 속박을 풀기 : 혁명을 혁명하기. 197 23. 상품에 대항하는 풍요 : 세상은 두 가지 길에 직면한다. 204 6부 희망을 생각하라, 위기를 생각하라 24. 희망의 이론은 그 대상, 즉 희망되는 것의 약함이나 위기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208 25. 위기는 자본에 내재한다. 211 26. 위기에서 재구조화로 갈 수 있는가 없는가? 이것이 자본의 목숨을 건 도약이다. 217 7부 지연된 위기 27. 희망은 화폐라는 히드라와 맞선다. 246 28. 화폐가 지배한다. 화폐는 우리 모두를 파괴하는 연쇄 살인마이다. 249 29. 오늘날 자본은 점점 더 가상적으로 되고 있다. 화폐는 아프다. 255 30. 우리는 화폐 위기의 주체들이다. 278 31. 재앙을 미루는 것은 정치경제학의 중심원칙이다. 금본위제의 포기는 떼가 지배할 길을 열어준다. 289 32. 전쟁은 자본의 황금기를 창출했다. 그것의 위기는 금과 화폐 사이의 연결을 끊었다. 298 33. 볼커 충격 : 건전한 화폐를 도입하려는 마지막 시도. 303 34. 검은 월요일 : 부채가 이륙하다. 316 35. 화폐와 가치 사이의 균열이 계속해서 커진다 : 일련의 심장 마비. 322 36. 자본의 취약성은 2007/2008년 금융 위기에서 폭발한다. 두 번째 심장마비? 326 37.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 그다음에는 불이다. 333 38. 폭풍이 몰아친다 : 코로나 위기. 341 39. 거대한 취약성이 심화된다. 349 8부 결론을 찾는 책. 행복한 결말을 찾는 희망 40. 가둠기가 이제 더 이상 가둘 수 없다. 366 41. 우리는 무리-풍요-저항-

출판사 제공 책 소개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 : 이 열차의 비상브레이크를 누가 당길 것인가? 탄핵 가능성이 집권 이후 가장 높아진 시기인 2024년 10월, 대통령은 범우사에서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며 한국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이 폭주 기관차의 비상 브레이크를 스스로 당기기를 거부했다. 비상벨의 경고음이 사회 곳곳에서 들린 지 오래인 데도 말이다. 사람들의 삶을 정신적, 신체적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기관차의 폭주는 한국에 특유한 현상이 아니다. 『폭풍 다음에 불』은 열차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인지를 질문하면서 시작된다. “기차는 더 빠르게, 더 빠르게 밤을 향해 질주한다.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강제 수용소로? 핵전쟁으로? 팬데믹의 연속으로?”(20쪽) 지금처럼 계속 달리면 위험하다는 위기의 징후들은 많았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의료 위기, 폭염, 자영업자 위기, 동물 멸종, 물가 폭등, 기후 재난, 복지 예산 삭감, 홍수, 디지털 성폭력, 산불, 가계부채 폭증, 오염수 방류, 혐오 범죄, 블랙리스트, 빈부격차 ... 그리고 핵전쟁. 홀러웨이는 이 기차의 종착역을 가리키는 푯말이 점점 더 선명하게 깜빡이고 있다고 쓴다. 도착역의 이름은 “멸종”이다. 희망은 있을까? 희망의 현 상태 : “그래, 알아. 그런데 뭐 어쩌겠어?”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구절을 읽고 공감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런 시대에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폭풍 다음에 불』의 저자는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전쟁터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 사회적 참사의 진상이 규명되지 않는 것, 책임자들이 처벌받지 않는 것, 법이 돈과 권력의 소유 여부에 따라 차등 적용되는 것, 필수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열악한 조건 속에서 착취당하는 것, 원전 오염수 방류를 막지 못하는 것 ... 사람들은 이 모든 것에 분노한다. 우리 시대에 이는 세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이다. 홀러웨이는 분노와 희망이 서로 분리되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럴 때 희망은 “어, 별로 안 좋겠는데” 정도로, 또는 “우리 못 본 척해도 다 잘될 거야”로 희석되거나 질식사하고 만다. 분노하는 이유는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노와 희망이 분리되면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분노했던 것을 그냥 받아들이게 된다. 끔찍한 소식들을 읽고서 어쩔 수 없다고 어깨를 으쓱한 후 곧장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다. “구걸하거나 길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는 다른 곳을 쳐다본다. 우리의 분노는 도덕적 불편함으로, 죄를 지었다는 불편한 죄책감으로 된다.”(26쪽) 이런 태도는 우리가 알다시피, 그 문제를 야기하는 체제적 힘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것이다. 홀러웨이의 말처럼, 이럴 때 희망은 “그래, 알아. 그런데 뭐 어쩌겠어?”가 된다. 우리는 희망을 다시 배워야 한다 : 희망은 “좋을 텐데”가 아니다 희망을 말하기 위해 홀러웨이가 참조하는 사람은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세 권의 대작 『희망의 원리』를 출간한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다. 블로흐는 동화, 춤, 음악, 문학, 종교 등 모든 종류의 인간 활동에서 희망의 중심성을 보았다. 그는 그 속에 다른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추구가 있다고 보았다. 블로흐가 희망을 말했던 20세기 중반과 비교해서 오늘날이 더 희망적이라고 홀러웨이가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홀러웨이는 블로흐가 가질 수 있었던 자신감은 오늘날에는 어려운 것이라고 말한다. “... 세계 곳곳에서 파시즘이나 파시즘에 가까운 것이 대두되고 있다. 어떤 유의미한 혁명적 정당도 없고, 비자본주의적이라고 주장이나마 하려고 하는 국가조차 거의 없으며, 혁명 세력으로서의 노동계급의 존재도 전혀 분명하지 않다”(43쪽). 희망을 말하는 것은 당시보다 더 어려워졌지만 희망 없음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것이야말로 죽음의 기차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오늘, 희망이 더 절실히 필요하다고 홀러웨이는 말한다. 책의 2부 ‘우리는 희망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우리가 배워야 할 희망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는 데 할애되었다. 희망을 배우는 것은 희망을 생각하기를 배우는 것이다(6장). 홀러웨이의 희망은 “전쟁이 없다면 좋을 텐데!”에서처럼 “좋을 텐데”의 소망적 사고와 분명히 다르다. ‘이성적 희망’은 정의된 목표에 도달하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요구하기 때문에, 현존하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싸우는(48쪽) 종류의 희망이다. 그리고 우리가 배워야 할 희망은 정체성주의적이지 않은 희망이다(7장). 그것은 사람을 남성, 원주민, 백인 같은 정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적대의 흐름(및 넘쳐흐름)을 기반으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성일 수도 있고 원주민일 수도 있고 흑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또 홀러웨이는 희망은 부재가 아니라 절규에서 시작되며(8장), 절규는 우리를 부정적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고(9장), 부정적인 사고를 넘어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안에서-대항하고-넘어서”라는 희망의 핵심적인 반정체성주의적 전치사를 채택할 수 있어야 한다(10장)고 쓴다. 화폐가 우리를 죽이고 있다. 우리는 생명의 편에 서거나 아니면 화폐의 편에 서야 한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홀러웨이는 영국 화가이자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지옥의 잠언」에서 인용한 문구 “물통은 가둔다. 분수는 넘쳐흐른다.”를 책의 맨 앞에 제사로 배치했다. 그런데 그 바로 아래에는 홀러웨이의 생각을 표현하는 “화폐는 가둔다. 풍요는 넘쳐흐른다.”가 있다. 물통이 화폐로, 분수는 풍요로 대체되었다. 분노와 희망과 존엄을 말하기 위해서는 ‘화폐’를 타격해야 한다는 것을 홀러웨이는 시작부터 말하고 있다. 돈 또는 화폐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생각은 이런 것이다. 우선 사람들은 더 많이 벌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자본주의 인간”, “자본의 노예” 같은 표현이 널리 쓰인다. 사람들은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돈벌이를 해야 하는 현실을 자조할 때 이런 말을 쓴다. 사람들은 “자본주의”로 인해서 희생되고 질식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희망의 현 상태가 “그런데 뭐 어쩌겠어?”로 끝나듯이, 화폐에 대해서도 “자본주의인데 뭐, 어쩌겠어?”로 끝나고 만다. 화폐 없는 세상 같은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화폐는 자신을 영원하고 죽지 않는 것으로 제시한다. 화폐의 끝없는 자기 확장 운동이 모든 생명의 미래 존재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지만 “화폐를 넘어선다는 생각은 미친 사람들이나 하는 생각이다”(367쪽). 그렇지만 홀러웨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고 쓴다. 화폐의 추구가 지구 온난화와 환경 파괴의 배후에 있다. 개별적이고 대량적인 파괴 무기 생산의 배후에 화폐가 있다. 수많은 삶을 무의미하고 비참한 것으로 만드는 착취의 배후에 화폐가 있다. 이것을 사람들은 분명히 알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자조가 많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빠띠스따들은 “우리는 생명의 편에 서거나 아니면 화폐의 편에 서야 합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존 홀러웨이 인터뷰). 현실이 그러하다면, 화폐의 지배가 지난 수 세기 동안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비참과 파괴와 죽음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멸종 가능성에 직면하도록 하고 있다면, 화폐의 폐지를 해결책 모색의 중심에 두는 방법을 찾아야만 하지 않겠냐고 홀러웨이는 말한다. 풍요는 넘쳐흐른다. 자본은 무리를 두려워한다. 우리가 위기다. 블레이크의 분수를 풍요로 대체한 홀러웨이의 두 번째 문장에서 그는 풍요가 넘쳐흐른다고 말했다.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풍요는 어디에 있을까? 1960년대와 70년대 이탈리아의 ‘오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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