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월리스 스티븐스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1955)는 에밀리 디킨슨과 월트 휘트먼의 계보를 이어 미국 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미학을 구축해낸 대가로, 엘리엇과 로버트 프로스트와 비견되는 시세계를 선보인 시인이다. 그는 단어를 단지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닌 글자 자체의 모양이나 음조에 더 집중하여 시를 썼다고 알려진다. 그의 시는 세련된 언어들로 채워졌고 『월리스 스티븐스 시 전집』(1954)으로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수상한다. 미국 현대시의 뿌리로 평가받고 있는 월리스 스티븐스는 그동안 몇몇 문학 선집에 대표작 일부만 소개되어왔다. 따라서 한 시인의 전모를 밝히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았다. 한국어로 처음 완역되어 출간되는 그의 첫 시집 『하모니엄(Harmonium)』은 월리스 스티븐스를 한 권의 시집으로 온전히 만나볼 수 있어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시인의 야심이 시시각각 출몰하는 시들을 비롯하여 함께 수록된 스티븐스의 대표작 「아이스크림의 황제」, 「검정새를 바라보는 열세 가지 방법」 등은 ‘한 권의 스티븐스’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독자들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아이스크림의 황제’의 첫 시집 월리스 스티븐스는 낮에는 보험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시를 쓰는 일상을 죽을 때까지 고수했다. 직장 동료들은 그가 시인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스티븐스가 중년에 들어선 1923년 출간된 『하모니엄』은 100부도 채 안 팔렸으나 뒤늦게 몇몇 비평가들의 눈에 띄어 1931년과 1947년에 재출간되었다. 스티븐스의 시세계에서는 실재와 상상의 관계가 강조되는데 이는 그가 실재가 시인의 상상의 세계와 어떻게 결합하는지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실재는 상상과 결합된 실재로, 상상과 결합되지 않은 실재는 단순한 사실에 불과하고, 실재가 없는 상상은 단순한 공상일 뿐이다. 스티븐스의 시학은 실재와 상상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진정한 실재를 창조하는 것으로, 그가 평생 천착했던 이 주제는 첫 시집 『하모니엄』에 처음 등장한다. 이 주제는 그의 작품세계를 매우 일관되게 만들었고 삼십 년 뒤 그는 자신의 시 전집을 ‘하모니엄의 통일체’라고 부를 생각까지 하게 된다. 결국 『하모니엄』은 스티븐스를 이해할 수 있는 시작과 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영어에서 바람 소리를 의미하는 하모니엄(Harmonium)은 선율을 만드는 소박한 악기 풍금을 일컫는 한편 고대 라틴어로는 조화를 뜻한다. 이처럼, 음악과 어우러짐을 함께 담아내려는 『하모니엄』에는 1915년 등단작 「일요일 아침」부터 시집 발표 직전 완성한 「알파벳 C로 그려낸 코미디언」에 이르기까지 총 85편의 시가 담겨 있다. 이 시집에서 우리는 미국 현대시사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획득하려는 한 중년 신인의 씨름을 엿볼 수 있다. 첫번째 시 「지상의 일화」는 황야 한복판 수사슴들이 무리 지어 달리는 장면에서 출발하는 자유시로, 그 형식에 있어 구체적 시적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땅, 시선 그리고 움직임만을 잡아내는 특징을 보인다. 뒤 이어지는 두번째 시 「백조 향한 독설」은 고전 수사학 장르 ‘독설’을 표방하는 전통적 형식의 이행연구(couplet, 二行聯句)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인공적인 정원을 배경으로 제목의 백조가 아닌 거위와 까마귀 들을 등장시키며 스티븐스가 앞으로 펼칠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여정으로 안내한다. 무엇보다 국내에 이미 많이 알려진 초기 명작 「눈 사람」, 「아이스크림의 황제」, 「검정새를 바라보는 열세 가지 방법」 등을 만날 수 있는데 순수한 진실에서 상상으로, 상상에서 새로운 실재로 바뀌는 과정이 감각적인 시어들로 표현된다. 그 밖에 존 키츠가 쓴 영국의 대표적 낭만주의 시 「그리스 옛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의 미국적 재해석이라고 볼 수 있는 「항아리 일화」, 토속적이면서 전복적인 신대륙 정서를 담은 「쟁기질하는 일요일」, 도회적 모더니즘의 정수를 보여주는 「열 시의 환멸」 등도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처음 완역된 장시의 위용 「일요일 아침」은 스티븐스의 등단작으로, 주일 예배에 나서는 일요일에 가운 차림으로 커피와 오렌지를 즐기며 아침을 맞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현대 서구인의 존재론적 의미를 되새기는 정형시이다. 「우리 아저씨 외알 안경」은 현란한 수사와 유머로 그려낸 중년 남성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자 성찰을 이야기한다. 「알파벳 C로 그려낸 코미디언」은 16-17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가면 희극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등장인물인, 약삭빠르고 어수룩한 시종 크리스핀을 주인공으로 차용, 프랑스에서 미국 대륙으로 이주하는 시인의 일대기를 시적 전기 혹은 선언문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30쪽에 이르는 이 대작은 영웅적 대서사시를 패러디하듯, 형식, 서사, 시적 장치 등 모든 면에서 불균질적이며 복잡다단하여 독자의 인내력을 시험하는 듯하다. 스티븐스는 이 시를 완성하고 십 년 동안 새 작품을 쓰지 못하며 힘든 시기를 보낸다. 그러나 슬럼프가 끝난 뒤 그는 일곱 권의 시집을 통해 원숙한 시세계를 펼치게 된다. 시계가 울린다. 눈을 뜬다. 몸을 일으켜 출근 준비를 한다. 거울을 한번 보고 집을 나선다. 그는 걷기로 한다. 매일 조용한 주택가를 가로지르는 한 남자의 일상. 출근길은 산책이 되고 사유의 시간으로 바뀐다. 그의 눈에 부딪혀 앉는 사물들은 파닥이는 나비 무리, 광대한 밤의 기둥, 주택가 위로 떠오른 황금빛 환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