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퀴즈 온 더 블록> 화제의 인물!
MBC 아나운서이자 작사가 김수지의 첫 산문집
박준 시인, 김민정 시인, <윤희에게> 임대형 영화감독 강력 추천!
자신의 한계와 불안을 지렛대 삼아
스스로를 보듬어 조금 더 나은
오늘에 이른 사람의 단단한 마음에 관하여
“지금 그곳에서 꽃피우지 않아도
너의 봄날은 언제고 오니까”
내가 꾸는 꿈이 나를 초라하게 할 때
“스스로 뿌리가 단단한 사람이 되기 위해”
“수지야, 쫄지 마.” 아나운서 시험 준비를 시작하고 몇 해를 넘겨도 대형사 카메라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자신감은 뚝뚝 떨어졌고 마치 주인공이 정해진 무대에 들러리를 서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었다. 아나운서 학원 선생님들 역시 의아해했다. “뉴스도 곧잘 하고 이미지도 단정해서 어디 가서 밀릴 정도는 아닌데 작은 시험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이유는 단순했다. 바로 자신감.
태생적으로 불안한 기질인가 의심할 정도로 불안감을 껴안고 살았다. 10대 시절부터 먹고살 걱정을 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뭐든 붙들고 놓을 줄 모르는 아이라고 기억할 만큼 욕심 많았다. 그렇다고 뭐든 서슴없이 뛰어드는 성격은 아니었고, 경쟁에 능하지도 못했다. 놓을 수 없는 꿈을 붙잡고 동동거리며 살았다. “학교를 졸업하면 부와 빈이 드러나지 않는 세상이 열리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하루빨리 졸업하고 싶었다. 한 학년이 끝나고 교실을 옮기는 소란한 틈에 친구들 짐 사이로 재빨리 가루우유를 숨기면서 노심초사했던 그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가난이란 그런 것이었다. 들키지 않게 철저히 감추려고 해도 깨진 그릇을 이어 붙인 것처럼 꼭 티가 났다. 가루우유쯤이야 몰래 숨길 수 있었지만, 사회에 나와 마주하는 “너희 아빠는 뭐 하시니?” 같은 질문은 아무도 숨겨주지 않았다.
세상은 ‘볼품없는’ 그를 초라하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초라해지지 않았다. ‘똥배짱’이라던 담임선생님의 타박에도 악착같이 ‘인서울’을 해냈고, ‘알바 괴물’이 되어갈지언정 꿈을 향한 여정은 흘리는 땀만큼 단단해졌으니까. “무른 흙을 다지듯 슬픔으로 물러진 삶을 다져야 했던 나는 스스로 단단한 뿌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지금은 자랑스럽다.”
고생에도 정량이 있고
실패에도 총량이 있다는 믿음으로
“나는 이제야 사람에게 꼭 ‘지는 날’만 있지는 않다는 걸 안다. 기다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기는 날이 오기도 한다.”
계약직으로 방송 생활을 시작해 특별채용으로 MBC 아나운서가 된 김수지. 동기 중에서도 가장 늦게 방송을 시작했다. 가까스로 정식 아나운서가 되었지만, 아나운서국에서도 여전히 ‘걱정거리’였다. “진행을 안정적으로 잘하긴 하는데 확 시선을 잡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이고, 이렇게 가다가는 기죽어서 하던 것도 더 못하게 되지 않을까 위태로워 보이는 신입사원.” 동기들이 선배들에게 방송 피드백을 받을 때,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묘한 질투심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버티기. 시간이 흐르고 큰 방송을 하나둘 경험하면서 언제 불안했냐는 듯 무대를 신나게 누볐다. “자연히 ‘내 방송’이 찾아오는 것처럼 어쩌면 ‘때’라는 건 그냥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누구나 한 조각은 뺄 수 있는 젠가처럼.”
“괴로울 때마다 이 지난한 시간이 내 목표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양만큼의 시간일지도 모른다고, 그건 5천 원을 지불하고 커피를 마셔야 하는 당연함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치러야 할 값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하면 숙명을 이고 가는 인간처럼 퍽 순응이 되었다.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서도 정당하게 가진 것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200퍼센트의 힘으로 살아가기
“좌절은 뉴스가 끝나고”
작사가로서도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하자, 7년째 뉴스를 진행하면서도 뉴스에 ‘관심 있는 척’ 한다는 짓궂은 농담을 듣기도 했다. 소위 작사 일이 ‘대박’이 나면 그쪽으로 옮겨 가지 않을까 하는 시선 역시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즉, “어디서든 욕먹기 좋은 포지션”이었다. 내심 억울하기도 했지만, 누굴 탓할 일도 아니었다. 스스로 어느 한쪽에 소홀해지는 걸 경계해 에너지를 바닥까지 긁어다 쓰곤 했으니까. 그래서 다짐했다. 200퍼센트의 힘으로 나아겠다고.
오히려 두 가지 일을 병행한 덕분에 건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일에 대한 집착이 큰 나는 한 가지 일에 지나치게 몰두해 매일 좌절하고 남과 나를 비교하며 그나마도 한 줌 있는 자존감을 숭덩숭덩 썰어 흘려보냈을 것이다.” 오늘 한 뉴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퇴근길에 새로운 가사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독이고, 어제 쓴 가사가 채택되지 않아도 좌절은 저녁 뉴스가 끝나고 허락되었다. “쓰다 보니 알겠다. N잡러가 된다는 것은 지금처럼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일이다. 좋았다가, 안 좋았다가, 그래도 좋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 것. 행복하지만 힘들고, 힘들지만 행복하다.”
우리에게도 그런 전환의 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스스로를 소진하지 않도록 다양한 ‘나’를 만들어두는 틈새의 시간들이. 그리하여 그 틈 사이로 단단한 또 하나의 ‘마디’가 생겨나길 기대해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