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모든 발을 헛디디고 있으면 결국 그것도 걸음걸이가 된다”
박탈당한 공간에서 생존하고 활약해버린 이반지하의 말들
“공간 선생님, 어디 계세요? 왜 아무 데도 안 계세요?”
퀴어 예술가가 대면한 상실의 공간들을 탐구하다
“나, 평생을 집에서 도망치며 살고 있나.”(9면) 이반지하는 이런 질문으로 책의 서두를 연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속한 곳에서 매번 멀리 달아나야 하는 현실을 이제는 멈춰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퀴어 예술가이자 노동자, 일인 생활자로서 살아간다는 건 사방에서 비수처럼 날아오는 혐오를 견뎌내는 일인데, 살뜰히 준비해 먼저 쳐들어가거나 여유있게 살 곳을 골라내지 못하고 매번 끼어버리고 떠밀려나서 수비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에 이른 것이다. 이런 자각은 그가 지나온 공간들에 대한 회고와 각성으로 확장되는바, 이 책은 아무리 속하려 해도 속할 수 없는 자기 삶을 매번 시험대에 올리며 사는 사람, 이반지하의 치열한 공간점거기다.
이반지하는 ‘끼어버리다’(1부) ‘밀려나가다’(2부) 그리고 ‘헛걸음도 걸음이다’(3부)라는 말로 자신의 삶을 삼등분한다. 공간에서 끊임없이 배척당하는 존재의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아슬아슬한 희망을 적극 언어화하기 위해서다. 공간을 바라보는 그의 시야는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을 역동적으로 오간다. 자신의 방에서 시작해 편의점에서 목욕탕으로, 카페에서 야구장으로, 공공도서관에서 결혼식장으로, 쉼 없이 이동하고 훌쩍 뛰어넘는다. 자신에게 슬픔이나 분노, 소외감을 안겨준 공간을 스스럼없이 대면하는 이반지하의 글에서는 오갈 데 없는 청소년의 얼굴, 성별 이분법에 충실한 옷들로 채워진 옷장 앞에서 적절한 자기 옷을 찾지 못한 젠더퀴어의 얼굴, 상대적 빈곤에 허덕이는 청년의 얼굴, 지하철에서 투쟁하는 장애인 전사들의 얼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공공 도서관과 화장실을 빼앗긴 평범한 시민들의 얼굴이 보인다.
사회가 우리를 공간에서 밀어낸다면
나, 이반지하가 그 공간을 점거해버리겠다
어느날 이반지하는 헤테로 결혼식에 사회자로 정식 초대를 받았다. 결혼 당사자인 신부로부터 ‘아버지’(이반지하의 팬들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라는 칭호로 불리지만 예식장에 홀로 서 있는 그는 옷차림부터 낯선 존재다. 부모, 친척, 교회 지인들로 점철된 헤테로 대화합의 장이자 정상사회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이런 감각을 느낀다. “나는 어느 사진에 껴들어도 혼자 오려내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260면) 그러나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시간을 함께해준 이들과 감사와 응원, 애정 어린 축하를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이 통속적인 감동을 느낄 권리를 갈구하는 성소수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시작한다. “꼭 필요하거나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아니지만, 없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다.” 성소수자뿐 아니라 헤아릴 수도 없는 이유로 사회의 일반 범주에서 비껴나간 소수자들은 ‘일반’이나 ‘정상’이 아니기에 평범한 공간과 불화하고 부대낀다.
이반지하는 이런 불화의 감정을 섬세하게 끌어 안고, 세상에 산재한 공간 상실자들에게 공감하며 묻는다. “당신을 내버려두는 곳이 당신들에겐 있는가. 어중되고 속하지 못한 마음을 내버려두는 곳은 학교에도, 하다못해 한강공원 벤치에도, 어디에도 없던데. 나는 걸음마다 쉬었다 갈 곳이 필요하던데. 아무나 앉아도 되는 빈 테이블과 의자는 생각보다 흔한 것이 아니던데.”(247면) 우리가 정말로 ‘우리를 내버려두는 곳’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 공간은 어떤 모양일까. 그곳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이반지하의 공간 침투』는 누구나 속해 있지만 좀처럼 속하기 어려운 ‘공간’이라는 키워드를 던지며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계급과 빈곤, 젠더와 권력의 문제를 생생하게 묘파한다. 당신이 이 책을 어느 퀴어 예술가의 자전적이고 수다스러운 넋두리로만 읽는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빈곤의 공간’과 ‘공간의 빈곤’이라는 문제를 눈앞에서 놓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제대로 읽는다면 사방천지를 넘나들다가 어느새 훅 들어오는 이반지하의 일갈에 몸과 마음을 점거당할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