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가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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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 이코노미스트, 월스트리트 저널, 뉴요커, 뉴욕 리뷰 오브 북스 추천. 유럽의 역사를 바꾸고, 자본주의의 토대를 놓은 역사상 가장 부유한 기업가의 대담한 여정이다. 콜럼버스가 바다를 넘고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리던 바로 그 시대. 모든 방면에서 유럽은 바뀌고 있었다. 군소 가문에 불과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전통의 강자인 프랑스를 밀어내고 스페인에서 헝가리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했다. 가톨릭교회는 대금업 금지를 철폐했으며,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여 종교개혁이 촉발되었다. 복식 부기가 확산되고 무역로가 바뀌면서 한자동맹이 붕괴하고 경제 중심지가 이탈리아에서 서유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부르주아와 영주의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과 노동자들이 투쟁을 전개했다. 그 모든 일의 중심에는 야코프 푸거가 있었다. 이 책은 바로 그 야코프 푸거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고 있다. 격동의 시대에 세계 최대의 부를 쌓았던 한 자본가의 삶과 시대를 잘 담은 평전이자, 근대 국가와 자본주의가 형성되던 근대 초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흥미진진한 역사서다.

"우리가 사랑한 마법의 공간"

35주년 기념 재개봉, 극장에서 다시 만나요

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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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마법의 공간"

35주년 기념 재개봉, 극장에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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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 9 1장 여정의 시작 ― 17 2장 황제에게 꼭 필요한 존재 ― 49 3장 사업의 확장 ― 75 4장 금융의 마술사 ― 111 5장 상인의 전투 ― 125 6장 대금업의 합법화 ― 143 7장 종교개혁의 불씨 ― 173 8장 황제 선거 ― 185 9장 승리 그리고 패배 ― 213 10장 자유의 바람 ― 239 11장 농민 전쟁 ― 271 12장 북소리가 그치다 ― 303 맺음말 ― 327 후기 ― 338 주 ― 343 참고문헌 ― 352 찾아보기 ― 379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세계사의 궤도를 바꿔놓은 역사상 가장 부유한 기업가의 대담한 여정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자본가를 한 명만 꼽는다면 누구일까? 미켈란젤로를 후원한 메디치? 국제적 금융 네트워크를 구축한 음모론의 단골손님 로스차일드? 석유왕이자 세계 최고의 부자로 꼽히는 록펠러? 이들 모두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부자였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축적한 부로도, 역사에 끼친 영향으로도 이들을 넘어서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야코프 푸거다. 군소 가문에 불과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부상, 가톨릭교회의 대금업 금지 철폐, 면죄부 판매와 종교개혁, 한자동맹의 붕괴, 복식 부기의 전파, 경제 강국의 판도 변화,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 격화. 15~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났던 이러한 굵직한 사건들을 거치면서 점차 유럽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가게 된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 한 사업가가 있었으니 바로 야코프 푸거다. 야코프 푸거는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간 국내는 물론이고 영어권에서도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이 책은 영어권에서 푸거의 삶과 시대를 충실하게 소개했다는 평을 받으며 2016년 출간 당시 《뉴욕 리뷰 오브 북스》 《뉴요커》 《뉴욕 타임스》 《월스트리트 저널》 《이코노미스트》 등 각종 언론 매체의 주목을 받았다. 이자 대신 권리를 받아 부를 쌓다 야코프 푸거가 가업을 물려받을 때만 해도 푸거가는 직물 매매를 주력으로 삼아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유럽 최고의 부자로 거듭난 발판 중 하나는 투자에 가까운 채권 방식의 대출이었다. 푸거는 종종 돈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이자 대신 권리를 받았는데, 이것이 성공하려면 막대한 이익을 낳는 권리를 알아봐야 했다. 무역이 활발해지고 전쟁이 빈발하던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가치가 높은 권리가 무엇인지 푸거는 일찌감치 꿰뚫어보았다. 바로 은과 구리 광산의 채굴권과 소유권이었다. 신대륙이 발견되기 전까지 유럽 최대의 은광 도시는 슈바츠였다. 당시 이 지역은 흥청망청한 생활로 유명한 지기스문트 대공이 통치했는데, 그는 베네치아에 물어야 하는 배상금 때문에 막대한 금액을 빌려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사치스러운 생활로 기존에 진 빚을 제대로 갚지 않고 있었던 탓에 누구도 그에게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았다. 푸거는 이 상황을 이용했다. 그는 가문의 재산과 주변 지인들의 자금까지 합쳐서 배상금에 상응하는 금액을 빌려주는 모험을 택했다. 그 대신 상환할 때까지 슈바츠의 모든 수입을 갖기로 하는 등 여러 조건을 내걸었다. 지기스문트가 이 조건들을 지키면 푸거는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높은 지위를 이용해 무시해버리면 파산할 터였다. 지기스문트는 이후에도 돈을 빌리기 위해서 조건을 지켰고 그 결과 푸거는 막대한 부를 쌓았다. 다른 은행가들이 불공정 거래라며 계약 파기와 재협상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지기스문트는 이미 푸거의 편이 되었기 때문이다(38~43쪽). 거대 자본을 장기 투자하여 신사업을 개척하다 지기스문트에게 돈을 빌려주어 막대한 은을 손에 쥐게 된 푸거는 막대한 여유 자금을 확보했다. 어딘가에 이 돈을 투자해야 했다. 가장 간단한 일은 기존에 하던 직물 매매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직물 매매는 경쟁이 심했고 부가가치도 많지 않았다. 푸거가 눈을 돌린 곳은 구리였다. 구리는 16세기 전쟁의 핵심인 대포와 소총의 주원료였기에 독점할 수만 있다면 막대한 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누구도 이 사업에 쉽게 뛰어들지 못한 이유는 그만한 위험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일단 막대한 투자금이 들어갔다. 침수 광산을 복구하고 구리를 채굴하여 가공하려면 각종 시설과 공장이 필요했고, 용광로와 광산을 잇는 도로도 놓아야 했다. 이런 공사는 모두 시간이 오래 걸리니 당연히 투자금을 회수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더 큰 문제는 규모가 큰 구리 광산이 주로 오스만 튀르크의 침공이 빈번한 헝가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여건이 악화되면 삽시간에 사업이 망할 수도 있었다. 푸거는 독일왕 막시밀리안의 재능과 야심을 높게 사 그에게 많은 대출을 해준 상태였다. 막시밀리안은 푸거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빈을 수중에 넣고 헝가리까지 침공해 들어갔다. 푸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잇는 아르놀트슈타인을 매입하여 당시 가장 큰 구리 가공 공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막시밀리안이 독일 상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평화 조약을 체결하자 헝가리로 넘어가 구리 광산을 매입했다. 여기서 푸거는 투르조 야노시와 동업을 선택한다. 투르조는 침수 광산 복구와 은과 구리를 분리하는 공정의 전문가였다. 그러나 푸거가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은 그의 혈통과 인맥이었다. 투르조는 오스트리아인이었지만 조상이 헝가리 출신이라 현지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헝가리 국왕과도 관계가 원만했다. 푸거는 투르조와 수익을 반씩 나누기로 합의하였고 혼맥을 통해 관계를 돈독히 했다(51~56쪽). 막시밀리안에게 해준 대출, 투르조와의 동업, 과감한 장기 투자로 푸거는 누구도 생각하기 힘들었던 규모의 구리 사업을 성사시켰고 그것이 가져다 준 부는 그를 교황과 황제까지 압도하는 막강한 자본가로 거듭나게 했다. 가톨릭교회의 성서 해석을 바꾸어 금융의 문을 열다 15세기까지도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교회는 돈이 돈을 낳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 주어라(누가복음 6장 35절)' 같은 성경 구절에 근거해 이자를 물리는 것을 죄악시하고 고리대금을 금지했다. 물론 교황, 추기경, 주교, 왕 모두가 돈을 빌렸고 빌린 것보다 많은 돈을 갚고 있었으니 고리대금 금지법은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그러나 푸거 같은 사업가들이 주도권을 쥐는 새로운 경제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많은 지식인들이 고리대금 금지에 의존했다. 푸거를 견제하려는 사람들은 예금주에게 5퍼센트의 이윤을 약속하는 아우크스부르크 계약을 문제 삼고 있었다. 푸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진작부터 후원하던 신학자들을 동원했다. 제바스티안 일중은 대부자가 차입자처럼 파산의 위험을 감수한다면 계약이 유효하다고 주장했고, 젊은 신학자 요하네스 에크는 대부자가 차입자에게 일부러 피해를 주려고 하는 경우는 고리대금이지만 정당한 사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경우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푸거는 신학자들의 힘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교황 레오 10세를 직접 움직였다. 푸거는 레오 10세에게 알 수 없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고 얼마 후 교황은 이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교황 칙령에 서명했다. "고리대금은 본성상 불모인 것에서 얻는 이익, 즉 노동이나 비용, 위험 없이 얻는 이익을 일컬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돈을 빌려줄 때 노동, 비용, 위험 없이 이자를 부과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이제 금융은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149~160쪽). 왜 레오 10세는 푸거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레오 10세가 이탈리아 굴지의 금융가인 메디치 출신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시대가 급변해 교리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푸거가 교황, 주교, 신학자, 귀족들을 상대로 했던 막대한 로비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였을 것이다. 면죄부 판매의 배후가 되어 종교개혁을 촉발하다 역사 시간에 종교개혁을 배우면서 항상 듣는 말이 있다. 교황청의 부패, 성직자의 탐욕, 교회의 세속화 등에 분노한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종교개혁의 뒤에도 푸거가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514년 우리엘 폰 게밍겐이 사망하면서 마인츠 대주교 자리를 놓고 경쟁이 붙었다. 마인츠 대주교 자리는 신성로마제국의 일곱 선거후 중 의제를 결정할 권한이 있고 황제도 함부로 할 수 없었기에 눈독을 들이는 이들이 많았다. 팔츠의 선거후, 막시밀리안, 호엔촐레른 가문의 알브레히트가 각자의 후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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