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당신의 목을 조이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괴물
“그리스 신화에 ‘다마스테스’라는 노상강도가 마을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사람들은 그를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 또는 ‘잡아 늘이는 자’(The Stretcher)라고 불렀다. 그는 마을 주민들을 잡아다 강철침대에 눕혀 가학적으로 죽였다. 키 작은 사람은 침대 크기에 맞게 잡아 늘이고, 키 큰 사람은 침대 길이에 맞도록 팔다리를 잘랐다. 그의 정신병적 가학증은 마을을 온통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선 그것을 평화라고 여겼다.”(30쪽)
이 책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노동자의 운명은 신화 속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에 눕혀 끔찍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운명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프로크루스테스적인 획일주의는 노동자의 잠재력을 훼손함은 물론, 무능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자유시장경쟁 논리를 최선의 미덕으로 삼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경쟁에서 도태된 노동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여기서 경쟁이란 자본 세력의 재산을 불리는 데 누가 더 이로운 능력을 가졌는지를 겨루는 것이다. 경쟁에서 뒤처져 일자리를 잃거나 처음부터 아예 일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은 ‘무능한 자’라는 낙인이 찍혀 노예처럼 살아간다.
실업과 가난의 공포는 오롯이 당신의 무능함 탓인가?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거나 처음부터 일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무능함 탓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내 탓이오!’라는 자학적인 관념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견고히 떠받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실제로 최근 미국에서는 ‘요요(YOYO) 경제’라는 신조어가 나오기도 했다. 이는 “네 일은 네가 책임져라”(You’re On Your Own)라는 구호를 앞세워 실직에 대한 책임을 노동자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사회 분위기를 일컫는 말이다.(69쪽) 실업과 가난을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것은 게으르고 불성실한 노동자의 푸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프로크루스테스주의자의 도덕률이다.(170쪽)
이러한 프로크루스테스적 사고는 당대의 수많은 지식인을 통해 하나의 직업윤리로 자리매김해 왔다. 스톱워치를 사용해 노동자의 작업을 초단위로 쪼개는데 일생을 바친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는 “과거에는 인간이 우선이었지만, 미래에는 시스템이 우선돼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지지를 굽히지 않았다.(29쪽) 특히 산업화가 본격화될수록 지식인의 자본주의에 대한 신념은 굳건해진 반면, 노동에 대한 관심은 차갑게 식어갔다.
노벨상으로 치하할 만큼 위대한 과학?
가진 자만 옹호하는 공정하지 못한 이론!
자본주의가 불변의 진리로 자리매김해 온 데는 지식인 가운데서도 특히 주류 경제학자의 역할이 컸다.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250년 전 ‘보이지 않는 손’이란 개념을 도입했다. 이 말은 자본주의에 대한 무한신뢰를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으로, 지금도 여전히 경제학 교과서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6쪽)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공정하고도 효율적인 경제를 창출하는 쪽으로 작동한다는 게 스미스의 생각이었다. 스미스의 생각은 후대 주류 경제학자들을 통해 하나의 과학으로 격상되었다. 이후 경제학자들은 물리학자들이 써온 어려운 수식을 차용해 자신들의 이론을 더욱 정교하게 가다듬는 데 활용했다. 경제 위기가 빈번해지면서 자신들의 과학에 허점이 노출될 때마다 하나로 똘똘 뭉쳐 더욱 어렵고 복잡한 수식을 만들어 자신들의 학문과 자본주의를 지켜나갔다. 물론 경제학계 내부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폴 크루그먼 같은 경제학자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경제학자들이 그렇게나 많은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이룰 수 있었던 건, 현대 거시경제학의 불가사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14쪽)
하지만 주류 경제학자들의 불가사의한 믿음은 이제 신념을 넘어 하나의 신앙이 되었다. 그들의 유일신은 단연 ‘시장’이다. 시장에 조금이라도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자는 마치 중세시대의 종교재판에서처럼 이단으로 몰아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강철침대가 위력을 발휘하는 대목이다.(11쪽, 110쪽)
그들이 유독 침묵을 지키는 대상
정교한 과학 이론으로 무장한 경제학이 유독 침묵을 지키는 연구 대상이 있다. 그건 바로 ‘노동’이다.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노동은 본래 자기들의 영역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노동이 주류 경제학자들에게 의미 있는 개념으로 비춰지기 위해서는 ‘효용’[utility:향유(enjoyment) 대신 사용된 경제학자들만의 괴상한 용어]으로 환원될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노동은 효용의 상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주류 경제학자들의 생각이다.(16쪽) 노동자가 자신이 벌어들인 임금을 ‘소비’할 때 비로소 경제학자들은 ‘효용’이라는 그들만의 괴상한 용어를 들어 노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경제학자들에게 노동이란 소비의 전제조건일 따름이다. 아울러 경제학자들에게 노동자란 잠재적인 소비자로서의 의미만 지닐 뿐이다.
노동이 경제학자들에게 의미 있는 대상으로 다가가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의 정체성을 노동력(혹은 기술 등)을 파는 상인으로 바라 볼 때, 경제학자들은 주목한다. 애덤 스미스는 “사람들은 교환함으로써 살아가거나 상인으로 변해가고, 사회 그 자체는 적절하게 상업사회의 형태로 진화해간다”라고 언급했다.(237쪽) 즉, 경제가 돌아가는 핵심은 생산보다는 교환(거래)에 있다고 스미스는 여겼다. 이는 세상에서 ‘노동’이라는 개념을 ‘거래’로 대체함으로써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태생적으로 불온한) 노동의 가치를 아예 처음부터 거세해 버리려는 속내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각은 애덤 스미스 시대 이후 현재까지도 경제학계는 물론 산업계 전반에 팽배해 있다. 예컨대 미국 최대 통신회사 AT&T는 4만 명의 노동자를 해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평을 내놓았다. “우리는 노동력의 전반적인 개념을 넓혀야만 한다. ‘일자리’(job)가 ‘사업’(project)으로 대체되고 있다. 따라서 ‘업무의 영역’(field of work)은 늘어나는데도 사회에는 실직자가 줄지 않는다. 일거리가 없는 게 아니라 일자리가 없는 것이다……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고용한 것으로 봐야 한다. (노동자는) 이 회사에 자신의 기술을 팔러 온 상인이나 마찬가지다.”(42쪽)
고용관계는 고용자(기업)와 피고용자(노동자) 간의 자유로운 계약으로 맺어진다는 게 주류 경제학자들을 포함한 시장주의자들의 생각이다. 이러한 계약은 마치 물건을 사고파는 것과 다르지 않다. 소비자에게 필요 없거나 매력적이지 않은 물건이 팔리지 않듯 기업에 불필요한 노동자는 고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때 노동의 필요성 여부는 전적으로 노동자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한다. 경쟁에서 뒤처진, 효용가치가 떨어지는 노동은 노동자 개개인의 몫일뿐 시장의 결함 탓은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부당노동행위를 일삼는 불법 고용관계 역시 계약의 논리로 풀어내면 명쾌하게 설명된다는 게 시장주의자들의 입장이다. 피고용자(노동자) 측에서 부당노동행위를 이유로 계약의 해지를 주장하면 된다는 식이다. 즉, 계약법상 손해배상의 법리로 해결하면 충분하다는 논리다.(95쪽) 이런 식의 주장이라면 노동법은 처음부터 불필요한 제도가 되고 만다.
경제학자들이 이론적 도구로 사용하는 수식은 물리학자들의 그것만큼이나 복잡하다. (실제로 경제학자들이 물리학자들을 동경해온 모습은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_104쪽)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얼마나 단순하고 빈약한지를 드러낸다. 그들의 이론 모형에 등장하는 가계는 항상 이성적인 소비의 주체이고, 기업은 부실이 전혀 없는 합리적인 생산 주체이다.(124쪽) 경제학은 어떠한 결함의 예외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누가 봐도 모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