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고 난삽한 이전 문장의 구습을
질박하고 명쾌한 사상과 작법으로 개혁한 당송시대의 문장가들
그 혁신적 글쓰기의 핵심을 폭넓게 조명하다
◆ 당송팔대가 한 명 한 명의 삶과 문학 그리고 그들의 사상과 글쓰기를 역사적 맥락과 예술적 차원에서 총체적으로 개괄하는 첫 인문교양서
◆ 언어학과 문학이라는 학문적 기반을 바탕으로 다양한 작품을 분석해 당송팔대가의 문제의식과 글쓰기의 특징을 조목조목 파악
◆ ‘팔가’ 명칭의 유래에서부터 그들의 ‘고문古文운동’이 거둔 성과와 후대에 미친 영향까지, 중국 고전문학을 다각도에서 조망
출간 의의
그 중요도와 지명도에 비해 ‘당송팔대가’(이후 ‘팔가’)의 전반을 개괄해 독자대중에게 선보이는 인문교양서는 의외로 찾아보기 힘들다. 전공자를 위한 학술서적 분위기의 문집 총서나 몇몇 인물의 평전 또는 작품 해설과 주석에 충실한 교과서 같은 책이 대부분인데, 그나마 몇 종 되지 않으며 한 권의 책에 8인의 면면을 유기적으로 다룬 책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번에 글항아리에서 출간하는 『문장 혁신 - 당송팔대가의 글쓰기는 왜 고전이 되었는가』는 팔가의 삶과 문학 그리고 그들의 사상과 글쓰기를 총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맞춤한 첫 책이 될 것이다. ‘제2장 기기묘묘한 한유와 의기양양한 한유’부터 ‘제9장 유심주의 문장가 소철’은 한유부터 소철까지, 8인의 생애와 사상을 요약하고 그들의 작품이 거둔 예술적 성취를 다양한 작품 분석을 통해 제시한다. 그들의 출현 배경과 역사적 지위를 짚어보는 제1장과 그들이 후대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 제10장과 제11장은 팔가를 중심에 놓고 중국 고전문학의 흐름을 조감하는 길잡이다.
팔가의 출현 배경과 산문문학에의 공헌
당송시대 이전의 정통문학은 변려문이었다. 사륙변려체라고도 불리는 변려문은 봉건 지배층의 문체로, 반드시 대구對句를 이뤄야 했으며 미사여구를 다듬고 전고典故를 많이 사용해 엄격한 형식미와 수사적 장식성을 중시한 ‘묘당廟堂문학(조정과 신료들의 글)’이었다. 고상하며 경직된 이런 문장은 통치계급의 공덕을 과장되게 기리며 공허한 아부를 일삼는 데 편리할 뿐 사실을 분명히 반영하지 못하고, 나아가 사상과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기 어려웠다.
남조南朝 시대에 왕검王儉이 쓴 「저연비문褚淵碑文」에서도 “천독川瀆의 영휘靈暉를 부여 받고, 규장珪璋을 머금어 광채를 드러내었다. 화순함은 안으로 엉겨 있고, 영화로움은 밖으로 드러난다. (…) 효경스러움이 깊고 두터운 것도 이로 말미암아 이룬 것이로다”라고 말했다. (중략) 만약 황제가 한 쌍의 옥패를 내릴 경우 산문으로 주문奏文을 바친다면 “삼가 감사합니다”라는 두 마디면 될 것인데, 변려문에서는 매우 많은 말로 설명한다.
_ 27쪽
팔가의 ‘고문운동’이 개혁의 대상으로 변려문을 삼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고문운동은 변려문 이전의 문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팔가의 문학 혁신운동이었다(37쪽). 궁정 권력에 복무하는 거짓말과 빈말을 생산해내느라 문장 본연의 임무를 저버린 변려문에 저항해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거나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데 적합한 산문 쓰기를 주창한 것이다. 따라서 팔가의 산문은 공통적으로 문장의 사회적 기능에 주목했으며 어투는 비교적 통속적이었다. 즉 문예만을 문예를 하지 않았으며, 어휘가 평이했던 것이다. 또한 난삽하게 늘어놓아 사리를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변려문에 반해 의론의 분석과 논리가 명쾌했다.
고문운동을 창도한 한유와 유종원
한유와 유종원은 모두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관직에 나가 좌천된 이후 사회현실에 눈을 뜬 당대의 지식인이자 문장가였다. 백성에 해악을 끼친 고위관리와 불교를 반대한 이유로 한직으로 밀려난 한유의 사상은 인민의 질고에 대한 동정에서 시작했다. 그는 백성이 착취당하는 원인으로 환관의 전횡과 번진의 할거, 불가와 도가의 폐단을 들고 이를 비판했다. 또한 성삼품설의 ‘하품자下品者’로 제왕과 공경의 자식을 들어 노동인민을 단지 어리석고 악한 자로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진보적인 정치관은 그대로 문학사상에도 영향을 미쳐 산문창작에 유례없는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인습에 젖지 않고 진부한 말을 힘써 물리쳤으며, 오히려 잡스러운 이야기를 즐겨 예술적 자양분이 풍부했다. 「모영전」이 그 예로, 익숙한 사물인 붓을 의인화해 인물의 개성이 잘 드러나 있다.
유종원은 영정혁신 실패로 말미암아 15년 동안 굴욕적인 유배 생활을 경험했다. 좌천 이전에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그는 유배 생활 동안 사회 하층민의 삶을 가까이에서 겪음으로써 사상이 일변했다. 사상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작법의 변화로 옮아갔으니, 젊은 시절 추구했던 화려한 문풍을 버리고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며 현실을 반영하는 문학혁신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그는 팔가 가운데 묘사가 핍진하기로 으뜸이다. 특히 약장수, 악사, 목동 등 밑바닥 인생의 인물묘사는 그들이 직접 말하는 듯 구체적이며 생동감이 있다. 「동구기전童區寄傳」은 ‘구기’라는 이름의 열한 살 난 목동이 사람을 납치하는 호적 두 명을 기지로 죽이는 사건을 묘사하는데, 한 편의 소설을 보는 듯하다.
도적 가운데 “한 사람은 장보러 가고 한 사람은 누워 길가에 칼을 내려놓았을” 때 “목동은 조용히 그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묶인 팔로 칼을 등지고 위아래로 힘을 써 끊은 뒤, 칼로 그를 죽였다.” 세부묘사가 매우 자세하다. 그러나 구기가 “아직 멀리 달아나지 못했을 때 장보러 간 자가 돌아와” 다시 잡혀 묶였고, “장차 목동을 죽이려 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줄거리가 아슬아슬하여 독자로 하여금 긴장된 마음을 갖게 한다.
_ 134쪽
통속적인 구양수와 주도면밀한 증공
구양수는 형식과 기교에 치중한 송대 초기의 산문 풍조에 반발해 통속적 어투와 일상어를 사용함으로써 산문의 외연을 넓히는 데 힘썼다. 당나라 때 한유와 유종원의 고문운동이 일정한 성과를 얻었지만 변려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송나라 초기에는 변려문을 숭상하는 ‘서곤파’가 융성해 산문의 입지가 좁아져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구양수는 한유를 추종함으로써 다시금 고문운동에 불씨를 당겼다. 구양수는 글은 생활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문학론에 입각해 일상적이며 쉬운 언어로 ‘시시콜콜’하게 인물과 사물을 말함으로써 세상의 이치를 곡진하게 전달했다. 저자는 「붕당론朋黨論」을 예로 든다. “대개 군자와 군자는 같은 도로 벗이 되고, 소인과 소인은 같은 이익으로 벗이 됩니다. 그러나 신은 소인은 벗이 없고 오직 군자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까닭은 어째서일까요?”(176쪽) 어떠한 과장도 없으며 기이한 글자나 괴상한 구절도 쓰지 않아 쉽게 이해되는 문장의 모범이 될 만하다.
입신과 처사, 학문과 문학 모두 구양수를 모범으로 삼았던 제자가 있었으니, 바로 증공이다. 후세 사람들이 ‘구․증’이라 일컬을 만큼 증공은 스승의 사상과 문풍을 이어받았다. 그렇다고 증공이 스승 구양수의 그늘에만 머물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역사가로서의 문장을 이룩해 팔가 가운데서도 독특한 풍격을 펼쳤던 것이다(300쪽). 증공 문장의 특징은 ‘주도면밀한 조사와 자세한 분석’(312쪽)이라고 할 수 있다. 「월주조공구재기越州趙公救災記」를 보면, 구황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월주 소속의 각 현에서 행한 조사를 다양한 항목과 일련의 숫자를 동원해 매우 상세하게 열거한다. “민 가운데 늙어 고단하거나 병약하여 자급할 수 없는 자가 2만1900여 명이다” “한 해에 궁민窮民을 위한 공급이 쌀 3000석 주는 것으로 그친다” “부자에게 가두어 실어온 것과 승과 도사들이 먹고 남은 것으로 쌀 4만8000여 석을 모았다”(310~311쪽)와 같은 자세하고 풍성한 서사는 사학자 증공의 주도면밀한 문학이 구체적이고 치밀한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