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성장하는데, 우리는 왜 점점 더 불행해질까?
1960년대 이후 한국은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통해 1인당 GDP는 60년대에 비해 약 250배가 늘어났고, 1996년에는 선진국 클럽이라는 OECD에도 가입했다. 2011년 현재, 한국의 1인당 GDP는 2만 달러에 이르고, 경제 규모는 세계 13위를 차지할 만큼 경제성장의 모범국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렇지만 이 같은 눈부신 성적표를 받아든 한국인들의 자화상은 우울하기만 하다. 여러 조사를 보면, 세계에서 한국인의 행복도는 최하위권이며(영국 레스터 대학, 103위), “당신은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한국인의 70%는 “나는 불행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SERI, 2008). 실제 통계를 보면, 한국은 자살률은 세계 1위이고(WHO, 2009), 출산율은 가장 낮으며(통계청, 2007), 노동 시간은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긴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환경 면에서도 온실가스 배출량의 증가 속도 역시 OECD 최고이다. 이런 통계를 보면, 한국인의 운명은 “어렵게 태어나서 좋지 못한 환경에서 죽도록 일만 하다가 자살하는” 것으로 비쳐진다. 게다가 소득불평등으로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고용 없는 성장으로 실업률은 치솟기만 한다. 결국 경제는 계속 성장했지만, 우리들의 삶은 결코 행복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성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까? 1인당 GDP가 3만 달러가 되고, 경제 규모가 더 커지고, 주가가 더 높아지면 지금 행복하지 않은 우리들의 삶이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 책에도 나오지만, 한국보다 더 잘 산다는 구미 선진국의 사례를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경제성장률을 높이면 우리의 삶이 윤택해지고,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주장해왔던 정치 지도자나 경제학자들의 ‘믿음’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의 대답은 바로 “그렇다”이다. 그리고 경제성장이 이데올로기로 둔갑해 숭배의 대상이 됨으로써 오히려 인간을 소외시키는 현상을 낱낱이 고발한다.
우리는 왜 경제성장의 노예가 되었는가
좌파든 우파든 자신이 사는 사회를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자는 목표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다만 어떤 방법으로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에서만 차이를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우파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더 잘 살고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경제가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경제가 성장하고, 그 믿음을 마치 신앙처럼 숭배한 결과, 지금 우리 사회는 과연 살기 좋은 곳이 되었는가? 경제가 성장했다고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경제성장을 당연시하는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지극히 평범한 관념에 불과한 경제성장에 온 사회가 과도하게 집착해 경제성장의 관념이 망상의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한 강박관념이 살아 움직이는 이데올로기로 둔갑해 경제는 물론,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개인의 심리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체를 조직하고 시스템을 재생산하는 체계화된 망상fetish으로까지 진화했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그리고 이 망상이 정치와 경제는 물론, 문화와 의료, 심리, 지구와 궤도권 우주(돈벌이를 위해 인간이 우주에 저지른 일이 있다는 것이 믿기는가?)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번지며 저지른 실상을 낱낱이 고발한다.
이 책은 우선 경제가 더 성장해도 사람들은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이스탈린의 역설’을 다양한 통계와 자료를 통해 실증적으로 제시하면서, 한 발 더 나아가 경제성장이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행이 경제성장을 지탱해준다고 지적한다. 즉 현대 소비자본주의는 사람들의 불만족 상태를 계속 조장해서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하며, 광고산업의 본질적 역할이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경제성장이 행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경제성장으로 행복을 주던 많은 요소들, 즉 개인의 정체성과 가족, 공동체, 환경 등이 현실 속에서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책에서 언급한 구미 선진국의 예를 볼 것도 없이 위에서 언급한 한국의 예를 보라!). 저자는 경제성장에 집착해온 구미권 사회의 강박관념에도 불구하고 소득이 늘면 더 행복해질 거라는 믿음이 명백한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이 현대 자본주의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좌우파를 불문하고 정치권은 경제성장을 부르짖고 개인들은 더 부자가 되려고 안달하는 사회 분위기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느라 더 불행해질 뿐 아니라 자연환경까지 망치고 있으며, 성장에 집착한다고 해서 여전히 남아 있는 빈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무조건 경제성장을 반대하는 것만은 아니다. 저자는 개발도상국이나 극빈국의 경우 여전히 경제성장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사치스런 자본가나 탐욕스런 금융족벌의 권세를 키워주기보다는 올바른 유형의 성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요된 정체성과 성장 제일주의
이 책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는, 성장망상에 의해 지탱되는 현대의 소비자본주의가 인간의 정체성과 가족, 공동체, 환경마저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현대 사회가 산업자본주의에서 소비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사람들이 과거처럼 상품의 효용을 소비하기보다는 마케팅과 광고가 만들어낸 브랜드나 로고 같은 ‘상징적 의미’를 소비함으로서 자의식이나 정체성을 ‘강요’받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시스템의 이윤 추구방식이 과거처럼 생산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문화 형태를 시장의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기업은 마케팅과 광고를 통해 물질만능주의와 소비지상주의를 부추기면서 광범위한 문화공간에 뿌려놓은 상징을 매개로 사람들의 자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구를 소비와 소유를 통해 모두 해소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든 것이다. 그로 인해 필요 이상의 낭비와 과소비가 걷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성장과 개발은 환경 파괴마저 서슴지 않으며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 시스템의 이윤 추구방식의 변화는 권력의 주체가 이제는 막강한 정치권력을 넘어 시장을 지배하는 기업계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저자는 국가의 정치적 권력을 사적 시장에 넘겨준 일은 분명 신자유주의자들이 벌인 일이지만, 근원적으로는 소비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더 부자가 싶다는 욕망과 더 많은 소득을 벌면 더 행복해질 거라는 ‘성장의 망상체계Growth fetishim’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경제성장을 넘어 유디머니즘(행복주의)으로-“자본주의를 무시하자!”
경제성장의 망상체계를 극복하자는 저자의 대안은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하다. 성장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던지고 ‘축소이행’을 통해 새로운 정치철학, 즉, 탈성장을 지향하는 유디머니즘(행복주의)을 제창한다. 이 철학이 제안하는 것은, 개인적, 집단적 행복을 찾아나서는 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저자는 물질적 풍요가 넘치는 현재 상태에서 자본주의적 생활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많이 벌어서 많이 소비하고, 그러기 위해 죽도록 일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을 그만두고, 광고도 무시하고, 최신식 장치나 특별히 의미 없는 쇼핑도 다 소용없다고 마음먹고 살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사는 데는 바리케이드를 칠 일도 없다. 또 극심한 빈곤에 찌들 만큼 고통스런 일도 아니다. 광고와 마케팅에 현혹되어 잃어버린 참자아를 찾아 자기를 실현하기 위한 목표로 ‘덜 일하고 덜 벌어서 덜 소비하며 살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성장 이데올로기가 떠받치는 시장의 전횡으로 발생한 많은 병리도, 누구는 과로로 쓰러지지만 누구는 일자리가 없어서 자살까지 하는 부조리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탈성장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국가의 전복이나 자본의 파괴도 요구할 필요가 없다. 지금 처한 현실에서 출발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삶을 실현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