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한 사회의 시간을 간직한 타임캡슐이다
─ 중세를 들여다보는 새로운 방법
서양의 중세는 ‘암흑 시대’로 불리곤 한다. 기독교와 봉건제가 주축이 되어 예술과 학문의 발전을 가로막고 사회는 정체되어 있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지난 500년간의 세계사를 정복자인 서양 중심으로 바라보던 기존의 역사관이 최근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양의 근대를 인간 중심의 ‘빛’으로 상정하고 그 이전 천 년, 즉 중세를 신 중심의 ‘어둠’으로 보던 관점 역시 조금씩 균열이 나고 있다. 그러나 서양 중심적 시각에 익숙한 우리에게 중세란 여전히 생소하고 비합리적인 시대인 듯 취급된다. 《100단어로 읽는 중세 이야기》는 그러한 우리의 선입견을 해소하고자 하는 책이다.
언어 속에는 한 집단의 의식주, 사고방식, 역사, 세계관이 녹아 있다. 언어는 시대의 거울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의 생활상도 조금씩 변하게 마련이고, 그에 따라 언어 역시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 집단의 언어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따라가면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인간은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모든 관념과 실체를 파악하기 때문에 언어야말로 과거의 사회를 조망하는 결정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유럽 언어의 역사를 주로 연구해온 언어학자 김동섭 교수는 이러한 취지에서 100개 단어로 중세 유럽을 들여다본다. 중세 유럽인들은 어떤 환경에서 살았고, 어떤 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을까? 그들의 삶은 우리와 얼마나 다르고 또 비슷할까?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중세 유럽 여행을 떠나보자.
중세 사람들은 이런 말을 쓰며 살았다!
언어학자가 엄선한 100단어로 떠나는 중세 유럽 여행
이 책이 다루는 100개 단어는 중세에 많이 쓰였거나 중세 때 유래한 말들을 엄선한 것이다. 중세의 의식주, 이름, 직업, 경제, 명예, 봉건제 등과 관련된 이 말들을 통해 우리는 중세 유럽인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또 엄격한 기독교 사회로만 알려진 중세에 있었던 사랑의 일화들과 중세인들이 즐긴 오락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중세 서양사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왕들과 그들이 벌였던 무모한 전쟁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언어는 주로 영어와 프랑스어다. 많은 언어 중에서 두 언어를 통해 중세 유럽 사회를 들여다본 이유는 두 언어가 중세 유럽 역사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백년전쟁(1337~1453)은 서유럽의 패권을 놓고 당시 유럽의 최강국이었던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벌인 전쟁이다. 특히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고대 영어는 종말을 고하고 중세 영어의 시기로 옮겨갔는데, 이 시기에 많은 프랑스어가 영어 속에 들어갔다. 봉건제도와 기사도, 문학을 비롯한 문화와 건축 등 중세 프랑스 문화의 위상은 다른 언어권에 비해 높았다.
travel, hotel, champion, cartel, mystery…
지금도 많이 쓰는 말들이 중세에는 어떤 의미였을까?
길게는 지금으로부터 천 년 이상 전이었던 중세시대였던 만큼, 지금과 같거나 비슷한 철자의 말이라 해도 그 의미나 뉘앙스가 지금과 사뭇 다른 경우가 매우 많다. 심지어 서양의 중세라는 역사 구분 자체가 5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천 년간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중세기 안에서만 해도 단어는 계속 변천해왔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 고대 로마에 트리팔리움(tripalium)이라는 형틀이 있었는데 중세 프랑스어 travail(트라바유)로 바뀌면서 ‘고통’이나 ‘힘든 일’로 재탄생했고, 이것이 ‘여행’을 의미하는 travel이 되었다. 교통망이 제대로 없던 시절에 먼 곳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여행을 뜻하는 또 다른 영어 journey는 프랑스어 journee(주르네)에서 유래했다. 현대 프랑스어에서 journee는 ‘하루’라는 뜻이지만, 과거에는 ‘하루 동안의 여행’을 뜻했다. bonjour(봉주르)에서 jour는 영어의 day와 같다.
◈ 프랑스 수도 파리 시청 이름은 Hotel de ville(오텔 드 빌)이고, 노트르담 대성당 근처에 있는 650년 설립된 파리 시립병원은 Hotel-Dieu(오텔디외)다. 왜 모두 ‘호텔’이 들어갈까? 라틴어에는 ‘숙박을 목적으로 설립된 시설’을 가리키는 hospitale(오스피탈레)라는 말이 있었는데, 중세 프랑스어에 들어가 ‘숙박’을 의미하다가 더 좁혀져 영주의 저택이나 관청 혹은 공공기관 건물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우리가 아는 호텔(숙박업소)은 19세기 들어서 생긴 의미다.
◈ 중세에는 두 기사가 일대일 대결을 벌이곤 했는데, 이 결투에 임하는 전사를 샹피옹(champion)이라고 불렀다. 중세 기사도가 탄생하고 꽃을 피운 곳이 프랑스라 이 프랑스어가 널리 쓰인 것이다. 결투를 신청하는 ‘도전장’을 cartel 혹은 challenge로 불렀는데, 이는 현대로 와서 각각 ‘기업 연합’과 ‘진취적인 도전’이라는 사뭇 다른 의미가 되었다.
◈ 오늘날 ‘이해할 수 없고 신비로운 것’을 의미하는 미스터리(mystery)의 근원은 고대 그리스의 종교 의식에서 나온 mystes(뮈스테스, 비밀 의식에 가입한 사람)이고, 이 말은 ‘눈을 감고 입을 닫다’라는 뜻의 myein(뮈에인)에서 유래했다. 중세 도시에서는 교회에서 문맹의 농민과 시민에게 성경 내용을 가르칠 목적으로 거리 연극을 기획하기도 했는데 이를 mystery라고 불렀다. 영국에서는 교회가 아니라 길드에 속한 직인들이 연극을 기획하고 무대를 꾸몄는데 이에 따라 중세 영어 mystery에는 ‘직업’, ‘수공예’, ‘직업조합’이라는 뜻도 생겨났다.
100피스 직소 조각으로 맞추어내는 중세라는 큰 그림
지은이는 단어 선정만이 아니라 책의 구성에서도 매우 치밀한 면모를 보여준다. 우선 100개 장을 10부로 묶었는데, 평범한 중세인들의 일상과 의식주를 가장 먼저 배치하고 점차 권력자들의 이야기나 거시적인 이야기로 나아갔다. 보통 사람들의 생활상을 먼저 들여다봄으로써 시공간을 초월한 공감대부터 형성되도록 한 것이다. 또한 단어의 유래와 변천 과정도 추적하지만 그보다 그 단어와 관련한 역사적 사건과 뒷이야기를 부각해 살펴봄으로써, 읽어나갈수록 역사적 맥락이 더욱 풍성하고 오밀조밀하게 엮여나간다.
따라서 이 책의 100개 장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읽어도 무방하지만, 책 전체를 압축적으로 읽기를 권한다. 각 장이 짧은 만큼 숨은 행간이 넓고 많은데, 책을 읽어갈수록 서로 얽히면서 빈 행간을 채워나가기 때문이다. 마치 직소퍼즐을 맞추듯, 혹은 점묘법으로 그림을 그리듯 작은 조각 하나하나가 모이면서 중세 유럽인의 살아가는 모습이 눈앞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