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와 문법의 두께를 꿰뚫고,
피 흘리는 붉은 몸의 소리를 다시 호출하는 ‘첫 시’들
치열한 이미지의 시인, 김혜순의 아홉번째 시집 <당신의 첫>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345번으로 출간되었다.
김혜순 시인은 80년대 이후 한국 시에서 강력한 미학적 동력으로 역할해왔다. 한국의 여성시를 대표한다는 말도 그에겐 과언이 아니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평론가 이광호가 “김혜순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시학이며, 김혜순 시학은 하나의 공화국”이라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광호는 여기에, “동시대의 여성 시인들이 김혜순 공화국의 시민이었으며, 특히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언술 방식과 김혜순 시학의 상관성은 더욱 긴밀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시집에 실린 <모래 여자>는 한 여자의 미라를 통해 여성의 삶을 되짚은 작품으로 평가되면서 제6회 미당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것은 미당문학상 최초의 여성 수상자의 탄생으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멈추지 않는 상상적 에너지로 자신을 비우고, 자기 몸으로부터 다른 몸들을 끊임없이 꺼내온 김혜순의 시학은 독창적인 상상적 언술의 가능성을 극한으로 밀고 나가며, 언제나 자기 반복의 자리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같은 도형은 절대로 그리지 않는” 김혜순의 시는 그래서 어쩌면 늘 ‘첫 시’처럼 느껴진다. 그곳의 ‘첫 말들’의 내용은 새로운 이미지의 탄생이 아니라, 다른 목소리의 발명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 시집은 ‘당신의 첫’ 김혜순 시집이 될수도 있으리라.
‘사이’에서 만나는 ‘모래 여자’ 이야기
이번 시집에서 김혜순의 시와 만나는 지점은 ‘사이’이다. 이런 점에서 <지평선>이 시집의 처음에 놓인 이유는 명확해진다.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으로서의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몸이 갈라진 흔적”으로 남은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흰낮과 검은밤”의 사이에 김혜순의 시가 있다. 이것은 “핏물 번져 나오는 저녁,”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에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는 이야기이다. 그녀가 매가 되는 낮과 그가 늑대가 되는 밤,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그 “만남의 저녁”으로 들어가본다.
누가 쪼개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 사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 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놓았나
흰낮과 검은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지평선」 전문
그 ‘사이’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김혜순 시의 화자이자, 동시에 시인 김혜순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은 두번째 시에서 나타난 「모래 여자」이다. 상한 곳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로 모래 속에서 들어 올려진 여자는 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여자를 보존하기 위한 외부의 폭력으로 인해 신체가 훼손된다.
이제 그 ‘모래 여자’가 번쩍 눈 뜬다. 그리고 “사막의 밤하늘보다 깊고 넒”은 “여자의 눈꺼풀 속”에 담긴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모래 속에서 여자를 들어 올렸다
여자는 머리털 하나 상한 데가 없이 깨끗했다
여자는 그가 떠난 후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고 전해졌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숨을 쉬지도 않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와서 여자를 데려갔다
옷을 벗기고 소금물에 담그고 가랑이를 벌리고
머리털을 자르고 가슴을 열었다고 했다
그가 전장에서 죽고
나라마저 멀리멀리 떠나버렸다고 했건만
여자는 목숨을 삼킨 채
세상에다 제 숨을 풀어놓진 않았다
몸속으로 칼날이 들락거려도 감은 눈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자를 다시 꿰매 유리관 속에 뉘었다
기다리는 그는 오지 않고 사방에서 손가락들이 몰려왔다
모래 속에 숨은 여자를 끌어 올려
종위 위에 부려놓은 두 손을 날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낙타를 카고 이곳을 떠나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꿈마다 여자가 따라와서
감은 눈 번쩍 떴다
여자의 눈꺼풀 속이 사막의 밤하늘보다 깊고 넓었다 ─「모래 여자」 전문
‘모래 여자’는 자신의 몸과 정신을 갈갈이 찢어 세계의 곳곳, 광활하고 자유로운 자연에 두고, 현실에서 “밥하고 강의하고 이렇게 늙어”가는 존재이다. 때문에 현실의 시궁창 속에 살면서 그녀의 발은 “저 먼 산으로/늑대처럼 가버린다.”(「불가살」) 또한 이 여자는 출산과 절단의 상징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가위의 이미지를 가지기도 한다. 특히 자기 몸의 치욕을 씻어내기 위해 쏟아내는 거침없이 들끓는 에너지(이광호)로 표현된 붉은색 이미지는 김혜순의 앞선 시집 『한 잔에 붉은 거울』에서 전면화된 것으로, 이전 시집의 해설에서 이인성이 한 말처럼 “새로운 상상을 여는 색감으로 솟아오르고 있다.”(「붉은 가위 여자」)
저만치 산부인과에서 걸어나오는 저 여자
옆에는 늙은 여자가 새 아기를 안고 있네
저 여자 두 다리는 마치 가위 같아
눈길을 쓱 쓱 자르며 잘도 걸어가네
그러나 뚱뚱한 먹구름처럼 물컹거리는 가윗날
어젯밤 저 여자 두 가윗날을 쳐들고 소리치며 무엇을 오렸을까
비린내 나는 노을이 쏟아져 내리는 두 다리 사이에서
눈 폭풍 다녀간 아침 자꾸만 찢어지는 하늘
뒤뚱뒤뚱 걸어가는 저 여자를 따라가는
눈이 시리도록 밝은 섬광
눈부신 천국의 뚜껑이 열렸다 닫히네
하나님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나님이 키운 그 나무 그 열매 다 따먹은
저 여자가 두 다리 사이에서
붉은 몸뚱이 하나씩
잘라내게 되었을 때
아침마다 벌어지는 저 하늘 저 상처
저 구름의 뚱뚱한 줅은 두 다리 사이에서
빨간 머리 하나가 오려지고 있을 때
(저 피가 내 안에 사는지)
(내가 저 피 속에 사는지)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저 여자
뜨거운 몸으로 서늘한 그림자 찢으며
걸어가는 저 여자
저 여자의 몸속 눈창고처럼 하얀 거울 속에는
끈적끈적하고 느리게 찰싹거리는 붉은 피의 파도
물고기를 가득 담은 아침바다처럼
새 아가들 가득 헤엄치네 ─「붉은 가위 여자」 전문
‘첫’에 대한 질투에서 시는 다시 시작된다
표제작 「첫」에서 ‘나’는 “당신의 첫”을 질투한다. 무언가의 앞에 붙어서야 그것의 처음으로서의 성격을 만들어주는 관형사 ‘첫’은 죽은 명사들을 처음의 상태로 활성화하는 에너지 자체이다. 그래서 ‘첫’은 실체를 알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소유할 수 없다. 때문에 ‘첫’은 지독한 질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첫’의 이름 안에는 ‘첫’이 살고 있지 않다. ‘첫’은 언제나 ‘첫’의 자리로부터 도주한다. 그래서 영원히 만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첫’은 ‘끝’과 같다.
죽음과 탄생이 맞물리며, 처음과 끝이 흔적도 없이 서로의 역할을 바꾸는 김혜순의 시는 지배적 상징질서들이 만들어놓은 시적인 것들과 결별하고, 다시 그것을 게워내는 ‘첫’의 혁명이라 할 만하다.
내가 세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