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이 책을 쓰게 된 계기
오늘날 교회와 사찰에 가지 않는 사람은 많지만, 영화를 보러 가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화를 통해 세상을 보고, 삶의 의미를 생각할 정도로 이제 영화는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되었다. 그리고 국경과 세대 차이를 넘어 세계인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는 언어이기도 하다. 이를 절실히 느낀 일이 있었다.
2018년 홍콩중문대학에 머무를 때였다. 학교 행사에서 사회자가 나를 소개하자 대학생들이 내게 몰려왔다. 10명도 넘는 학생들이었다. 해맑은 얼굴의 학생들은 내게 한국말로 인사하고 대화하고 싶어 했다. 한국어를 전공하냐고 물으니, 모두 아니라고 했다. 저널리즘, 영화, 경영학, 공학을 공부한다고 답했다.
학생회장이라고 소개하는 의과대학 여학생은 한국어가 아주 유창해,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홍콩 대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며, 젊은 시절 우리가 얼마나 <영웅본색>, <화양연화>, <중경삼림> 등 홍콩 영화를 좋아했는지 말했다. 그리고 이소룡, 성룡, 주윤발, 장만옥, 종초홍, 임청하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웃으며 자신들의 부모님이 좋아하는 배우들이라고 답했다.
나는 학생들이 한국 문화와 노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절실하게 느꼈다. 학생 중엔 한국 영화 팬이 많았으며, <택시 드라이버>, <변호사>, <1987> 등을 열심히 보았다고 말했다. 1987년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궁금해했다. 2016년 ‘우산 혁명’이 좌절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대학 교정을 거닐다 보니 ‘자유의 여신상’을 둘러싼 흰 천에 구속된 학생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들은 역사를 잊지 않고, 정말로 홍콩을 좋아했고 친구들을 사랑했다.
내가 홍콩을 좋아하게 된 것은 영화 때문이다. 홍콩은 미장센이 가득한 도시이고 지저분하지만, 맛집이 가득하며 대륙과 바다가 만나고, 동양과 서양이 공존하며 전통과 현대가 교차할 뿐만 아니라 혁명과 저항의 정신이 넘치는 곳이기에 나는 여전히 홍콩과 홍콩 영화와 홍콩 사람들을 좋아한다. 이렇게 영화로 맺어진 홍콩과 나의 인연은 젊은 학생 세대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영화 속 인문학>은 어떤 책인가?
이 책은 영화를 통해서 본 인문학이고 사회 해석학이다. 앞서 홍콩중문대학 방문 때 홍콩 학생들과의 인연을 밝혔듯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그 사회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홍콩 감독 양가위는 혼자 영화를 보는 시간이 많았던 외톨이였는데, 이런 배경 때문인지 양가위 영화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인간의 고독이다. <아비정전>의 장국영(레슬리 청), <중경삼림>의 금성무와 양조위, <화양연화>의 주인공 등등. 어쩌면 왕가위 영화는 자신의 고독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한 번쯤 이런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음 직하기 때문에 양가위 영화에 공감하고 그를 좋아한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그와 대화하고 있는 셈이다.
<1부 우리 시대의 질문>은 자본주의 본질, 계급과 불평등 문제, 핵무기 위기 등 우리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1장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아귀레, 신의 분노>(1972)는 탐욕과 자본주의에 대하여 묻는다. 애덤 스미스는 상공업자의 이기심이, 막스 베버는 개신교 윤리의 금욕주의가, 독일의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 사치가 자본주의 탄생의 원동력이었다고 했다. 자본주의는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를 안겨준 것은 분명하지만, 비유럽 민중에게는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었다. 1970년대 유럽의 지식인들이 나치즘, 식민주의, 노예제 등 유럽 식민주의의 잔혹성과 유럽 중심주의의 어두운 역사에 대해 반성하기 시작한 것처럼, <아귀레>는 유럽 문명 뒤에 가려진 추악한 속성에 대해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헤어조크는 20세기 후반 오락 영화와 정치 선전의 거대한 파도에 맞서 평생 싸우며 예술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질문은 계급과 불평등 문제다(2장).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마이클 무어의 ,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기생충>은 불평등이라는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봉준호 감독은 극심한 빈부격차가 만든 비극을 영화의 문법으로 표현했다. 미국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는 힐러리 클린턴이 아니라 트럼프가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한 사람이다. 영화 가 보여주었듯,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많은 노동자와 흑인들은 오바마의 배신에 분노해 기권했고,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했던 저학력 저소득 백인 노동자들이 이민자, 여성, 동성애자를 비난하는 트럼프 지지로 돌아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변이었다.
왜 가난한 (백인) 노동자가 부유한 기업가와 그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할까? 존 조스트John Jost 교수는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 대가가 개인에게 너무 크기 때문에 기존 사회 체제를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한다고 진단한다. 물론 그런 다급한 단기적인 처방은 심리적 진통제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그들의 삶은 더 악화만 될 뿐이다. 한국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세금 인상과 복지 확대를 반대하는 ‘계급 배반 투표’가 계속될수록 불평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2021)은 불평등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인간군상들을 담았다. <기생충>이 상류층과 하류층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선을 보여주었다면, <오징어 게임>은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위해서 서로 죽고 죽이는 생존 투쟁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상대가 죽어야 자신이 살아남는다고 믿는다. <오징어 게임>에서 우리는 치열한 생존 투쟁을 오락처럼 바라보는 백인 남성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뉴욕 월가의 금융 투자자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목숨을 건 게임에 뛰어든 456명의 눈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처지가 비슷한 가난한 사람들과 죽고 죽이는 게임을 벌이며 돈을 벌려고 할 뿐이다. 어떻게 해야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람을 볼 수 있을까?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문제는 폭력과 죽음 충동이다. 3장은 핵무기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의 미래를 살피고 있다.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영화는 대체로 전쟁과 폭력을 다루거나 성적 본능과 억압을 다룬 줄거리가 많으며, 인간의 가장 깊숙한 내면의 동기와 충동을 탐구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는 핵 공포를 묘사한 블랙 코미디이다. 미 전략공군 잭 D. 리퍼 장군의 오판, 미국 대통령의 소련과의 협상 시도와 결렬, 결국 핵폭발로 지구는 멸망한다. 이 영화는 개인, 집단, 국가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위기가 만드는 참극과 핵 공포를 보여준다. 실제로 1962년 쿠바 위기에서 실현될 뻔했던 것처럼, 한순간에 인류가 절멸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오늘도 한반도에서는 핵무기의 공포가 계속되고 있다.
2부는 사회 곳곳에 숨겨진 구조를 찾아내는 질문들이다. 문명의 의미, 인종차별주의, 페미니즘, 가상현실과 포스트모더니즘 문제들을 다룬다.
진정한 부시맨은 어떤 모습일까? -“영화는 인류학 연구의 새로운 방법”
프란츠 보아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등 문화인류학자들은 문화상대주의를 주장하고, 문명과 야만의 구분은 유럽인들의 독단적인 편견이라 주장한다.
제이미 유이스 감독의 <부시맨>(1980)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서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부시맨이 비행기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발견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이 영화는 ‘부시맨의 시각’으로 서구인의 문화적 차이를 코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