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원하는 건
장애인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누구도 뒤에 남겨지지 않는 해방의 공동체다
연립과 공생의 세계를 향해 내딛는 장애학의 한 걸음
장애인을 위한 세상? 누구도 뒤에 남겨지지 않는 해방의 공동체!
《장애학의 시선》 각 장(1~8장)은 서로 다른 독립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읽어나가다 보면 각각의 내용들이 서로 얽히고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연결성 속에서 몇 가지 지점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장애는 인간 일반의 문제에 부차적으로 덧붙여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 인간사회의 모순과 차별을 온전히 해명하는 데 하나의 열쇠가 된다는 것, 그리고 ‘모두가 해방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이 말이다.
장애학이 추구하는 것은 단지 장애인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누구도 뒤에 남겨지지 않는 해방의 공동체(‘No one left behind’, ‘Leave no one behind’)라는 믿음은 이 책 전반에 하나의 태도로서 스며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일정한 비전과 윤리”를 탐색하는 장애학의 면모를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더 많은 이들에게 제안하고자 한다.
“느리게라도 꾸준히 걸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장애학의 시선에서 세상을 읽어내고 현장활동가들 및 독자 여러분들과 소통하는 작업을 힘닿는 데까지 해보려고 합니다. (……) 우리가 꿈꾸는 ‘연립聯立’과 ‘공생’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 함께 움직여가는 데, 이 책이 작은 쓰임새가 있기를 바랍니다.”
‘당사자성’과 ‘당파성’ 다시 쓰기: 시선의 폭력을 넘어 무엇을
에이블리즘(ableism), 즉 비장애중심주의와 능력주의로 점철된 세계를 아주 낯설게 만드는 것이 ‘장애학의 시선’이라면, 현실의 ‘장애인 당사자’를 향한 시선은 어떨까? 그들은 어떤 시선을 받으며 살아갈까? 주로 차별과 동정의 시선이며, 그것은 혐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동정과 연민은 흔히 혐오와 반대되는 감정으로 여겨지지만 오히려 동전의 양면에 가깝다. (……) 양자는 매우 쉽게 전환될 수 있는 감정인 것이다. 또한 동정은 혐오라고 인식되지 않기에, 선의로 포장되어 있기에 더욱 공고하고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이동권 투쟁이 시작된 지 25년이 지났지만, 장애인을 향한 이 사회의 시선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특히 정권을 틀어쥔 권력자들의 시선이 그렇다. “장애인들은 자신의 인간다운 삶에 필요한 것들을 정당한 권리로 요구하며 싸워왔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은 여전히 그것을 일종의 배려와 시선施善(자선을 베풂)으로 여긴다.” 사실 이건 대다수 비장애인의 시선이기도 하다. 미처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사용하는 무수한 장애 비하 표현들은 “여성혐오misogyny와 마찬가지로 장애혐오가 단지 어떤 개인의 태도의 문제가 아니며, 사회문화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그런 장애혐오 표현을 피하는 방법은 어쩌면 생각보다 간단할 수도 있다. 바로 장애인들의 존재를 감각하는 것이다. 그들이 내 곁에서 숨 쉬며 함께 살아가는 시민임을 말이다.
우리 모두가 장애 당사자(혹은 공사자共事者)임을 깨닫는 것, 즉 장애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연루되어 있는’ 사회적 문제라는 장애학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도 매우 중요할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가 당사자다’라는 명제가 지닐 수 있는 모종의 위험성 또한 충분히 인식해야만 한다. 요컨대 이 명제가 정치적 진정성을 갖기 위해서는 당파성partisanship이 필요하며, 이때의 당파성이란 고정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억압받는 이들과 사회운동이 추구하는 당파성의 기본 윤리가 바로 피억압자의 편에 서는 것이라 했을 때, 억압자와 피억압자, 다수자와 소수자의 위치성 역시 맥락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참사와 재난 다시 보기: “중증장애인들에게 이 사회는 언제나 세월호였다”
장애인들이 이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것, 즉 있어도 없는 듯 살아가길 강요받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그들에게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 역시 큰 위험이다. 각종 참사와 재난에 일상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동권 투쟁을 촉발한 2001년 오이도역 장애인 리프트 추락 참사 이후로도 장애인은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죽어갔다. “단지 대중교통인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장애인은 수도관이 동파되어 흘러나온 물에 얼어 죽고, 활동지원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시간에 난 화재로 불타 죽었으며, 장애등급 재심사에서 등급 외 판정을 받고 기초생활 수급권에서 탈락해 죽음으로 내몰렸다. 위험한 바깥세상과 달리 안전하다는 시설에서는 오히려 더 처참하게 죽어갔다. 온몸을 두들겨 맞아 죽고,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죽고, 밀폐된 환경에서 코로나19에 집단 감염되어 죽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죽어가야 했을까?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아니다. “‘사고가 나서’가 아니라 ‘사고가 나도록 방치돼서’, ‘불이 나서’가 아니라 ‘달아나지 못해서’”(홍은전, 〈당신에게 이 사회는 언제나 참사였구나〉) 죽었다. 그 어떤 위험도 따르지 않는 삶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삶에는 언제나 일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위험 그 자체가 아니다. 저자는 역사유물론의 핵심을 담지하고 있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구절을 패러디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위험은 위험일 뿐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위험은 재난/참사가 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위험을 재난/참사로 만드는 그 특정한 관계가 무엇인지 질문하는 일이다. 장애인들로 하여금 위험에 대처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관계 내지 조건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ability’(비장애=능력/할 수 있음) 및 ‘disability’(장애=무능력/할 수 없음)라는 단어와 그에 얽힌 의미망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법적 환상에 불과하다. “능력/비장애와 무능력/장애는 근본적으로 ‘소유하고have’ 있는 것, 혹은 ‘지니고 있는with’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무언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없다’는 것은 항상-이미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그리고 나를 둘러싼 조건과 환경 속에서만 논해질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장애인은 ‘people with disabilities’가 아니라 ‘disabled people’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후자의 단어에는 언제나 ‘by’(~에 의해)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렇게 생략되어 있는 (그래서 잘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이 장애인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만든다. 위험에 대한 대처는 물론이고 우리 삶 전반을 관통하는 ‘능력/할 수 있음’과 ‘무능력/할 수 없음’은 결국 관계의 문제이며, 그 점에서 정확히 정치적인 문제다. 앞서 언급한 장애인들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다. “리프트가 아닌 엘리베이터가 있었다면, 활동 지원서비스가 그들의 필요에 따라 충분히 제공되었다면, 부양의무제나 불합리한 근로능력 평가 따위로 기초생활 수급권을 제한당하지 않았다면, 장애인들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탈시설을 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이 지역사회에 마련되어 있었다면(아니, 애초부터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시설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면)”, 과연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을까?
자립생활운동의 주창자들이 ‘위험을 경험할 권리’를 이야기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안전이 아니다. 그 안전을 보장한다는 미명하에 장애인들을 가두고 인격적인 삶을 박탈하는 시설은 더더욱 아니다. 장애인이 능력 없는 존재로 격하되지 않는 관계, 즉 차별과 억압 없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장애인운동이란 이처럼 어떤 존재가 ‘장애화/무력화disablement’되는 관계를 문제 삼는 운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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