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춘만의 중공업

조춘만님 외 1명
2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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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 항만, 선박 조춘만의 산업 사진이 미래에 필요하게 될 이유 / 이영준 석유화학, 공장 조춘만의 58년 / 조춘만

출판사 제공 책 소개

현대중공업 용접사에서 국내 최고의 산업 사진가로, 한국 산업의 역사를 대변하는 조춘만의 중공업 일대기 1974년, 조춘만은 열여덟 살의 나이에 울산 현대중공업 조선소에 취업을 하게 된다. 찢어지게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그때까지 도시 구경이라고는 대구 시내에 몇 번 가본 게 다였던 조춘만에게, 당시 2만 5000여 명이 일했던 울산의 공장은 괴물 같은 모습으로 비춰졌으리라. 하루빨리 용접을 배워 돈을 벌고 싶었던 그는 잠자는 시간마저 아껴가며 어깨너머로 용접 기술을 익혔다. 용접봉이 탈 때 나오는 자외선 때문에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쉬는 시간에 용접 연습을 못하게 하는 조장에게 울분을 터트렸던 그는, 그러나 반년이 되지 않아 웬만한 용접사 못지않은 솜씨를 지닐 수 있게 된다. 이후 포항제철 제3고로 건설 현장 등 용접사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그의 발길이 이어졌다. 산업 현장에서 그때그때 일하다 보니 다음 일거리와 연결되지 않아 장기간 실직 상태에 처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제정신으로 버티기가 힘들었다. 아내는 임신을 했는데 너무 심한 입덧 탓에 음식만 먹으면 토해 날마다 청량음료인 사이다만 마”시던 나날. 그런 그에게 해외 진출의 기회가 주어진다. 1970년대 중반을 넘어가며 국내 건설사들의 해외 수주가 활발해지던 시기, 중동에 나가면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끈질기게 지원한 끝에 기회를 잡은 것이다. 1980년 2월, 갓 태어난 아들의 이름도 지어주지 못하고 한이석유(지금의 쌍용정유) 사우디아라비아 공장 건설 현장에 도착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살인적인 기후와 근무 시간(노동량으로 치면 한 달에 700시간)이었다. “지금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7월의 어느 날에는 너무 더운 날씨에 진이 다 빠져 그늘에 앉아 있는데 머리에서 흐르는 땀이 턱 끝에서 1초에 두 번 이상씩 뚝뚝 떨어”지기도 했다. “오늘날과 달리 머나먼 타국에서 일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수반되는,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전화 통화도 하지 못하고, 편지를 보내면 답장 받는 데 한 달이 걸리는 곳. 그곳에서 그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고작 어깨 높이의 침대 난간에 전깃줄로 목을 맨, 동료의 거짓말 같은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6개월을 버티기 힘든 그곳에서 2년을 일하고 돌아와 보니 “스물일곱이 된 아내가 울산에 아담한 단독주택을 마련해놓고 아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이번에는 쿠웨이트 서도하 발전소 건설 현장으로 건너가게 된다. 쿠웨이트에서는 날씨는 둘째 치고 “허리를 다쳐 고생을 했다. 비 오듯 쏟아지는 쌀알 같은 용접 불똥 하나가 귓속으로 들어가 고막을 태운 채 지금도 귓속에 박혀” 조춘만은 지금도 청력에 문제가 있다. 멈출 줄 모르고 돌진하던 한국의 산업 개발은 그렇게 그에게 상흔을 남겼다. 조춘만의 사진을 통해 제 모습을 찾은 한국 산업 경관 표상의 역사 1956년에 태어나 농사일로 잔뼈가 굵은 조춘만이 고향을 버리고 울산으로 향한 해가 1974년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바로 모래사장밖에 없던 울산 미포만에 현대중공업이 조선소를 짓고(1970년) 본격적으로 대형 선박을 짓기 시작한 해이기 때문이다. 1974년 ‘애틀란틱 배런’이라고 명명된, 현대중공업이 만든 길이 355미터, 폭 51미터, 26만 6000톤 급의 괴물 같은 배는 울산을 본격적인 공업 도시로 인식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당시의 공장들은 규모가 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울산 군민들은 공업이 뭔지, 산업이 뭔지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당시 울산의 어느 초등학교 교가 가사 일부가 ‘강산도 아름다운 우리 고장은 공장 연기 치솟는 공업의 도시’였다고 하니 아직은 산업을 괴물로 인식”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조춘만도 말한다. “(울산의 부곡동은) 1978년도에 나 역시 용접공으로 생활하면서 미래에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을 거라는 꿈을 키워나간 곳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공해가 심하다, 그런 말도 없었고 그저 공단이 가까워서 일하러 가기 좋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누구도 손댈 수 없는 괴물로 성장한 한국 산업 개발의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조춘만이 농사를 버리고 공업을 택한 것은 한국이 농업 국가에서 공업국가로 탈바꿈한 과정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당시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조춘만은 하나 다른 점이 있다. 불혹을 넘겨 사진에 눈뜬 후, 자신이 경험한 산업이라는 괴물에 카메라를 들이댄 것이다. 기계비평가 이영준은 조춘만의 사진을 두고 하나의 “조용한 혁명”이라고 말한다. 그로 인해 국가라는 프로파간다, 자본이라는 프로파간다가 끼어들지 않은, 최초의 제대로 된 산업 경관의 표상을 비로소 우리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혁명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이영준은 1778년 건축가 클로드 니콜라 르두가 프랑스 아르케스낭에 세운 왕립 제염소를 시작으로 서구 공장 건축의 역사를 살피고, 18세기 디드로의 『백과전서(Encyclopedie)』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구 산업 경관 표상의 역사를 짚어낸다. 20세기 초 찰스 쉬러가 찍은 포드 공장 사진부터 마거릿 버크화이트, 폴 스트랜드, 베허 부부, 윈스턴 링크의 사진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산업 표상을 지닌 그들에 비해 한국의 산업 경관은 초라하기만 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197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우리들은 수학여행을 현대중공업 조선소와 포항제철로 가게 된다. 하지만 거기서 우리가 본 것은 산업 시설의 숭고미가 아니라 앞사람 뒤통수뿐이었다. 우리들은 그런 공장의 시설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심이 없었고, 우리들을 인솔한 선생님들도 관심이 없었기는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에는 누구에게도 산업 경관이 아름다운 표상으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가 되면서 산업 경관의 표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기업 연감이라는 것이 발행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업 연감에는 산업 시설의 사진이 실리지만 이것도 제대로 된 산업의 표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진의 구도는 항상 공장의 전경을 배경으로 작업복을 입고 헬멧을 쓰고 손에는 설계도를 든 직원이 손으로 멀리 하늘을 가리키는 상투적인 것들뿐이었다. 그 사진들은 엄밀히 말해 산업에 대한 표상이 아니라 자본의 프로파간다였다.” “(그 사진가들은) 원래 자기 작업 하다가 돈벌이로, 혹은 약간의 경험을 위해 기업 연감 사진을 찍을 뿐이지 정유 공장의 파이프라인이 너무 아름다워서, 조선소의 크레인이 너무 웅장해서 못 찍게 하는 것을 뚫고 찍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금지된 경관, 강철의 괴물을 좇는 조춘만의 사진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 조춘만의 사진 찍기는 남의 눈을 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제외한 일반인에게 산업은 그 속살을 내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삼각대의 은빛도 검정 테이프로 감고, 옷도 자연과 비슷한 색의 옷을 입”은 채 조춘만은 누구의 주문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좇아 산업 경관을 찾아 헤맨다. “검은 보자기를 쓰고 오랫동안 카메라를 조작하다 보니 더러 수상한 사람이나 개 도둑으로 몰려 경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금지된 경관을 찍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조춘만을 두고 이영준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사진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중공업의 경관을 애호를 통해 선택하고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그것은 아주 작은 일이지만 매우 의미 있는 역사적 전환이다. 우리 곁에 있었지만 우리의 시선 안에 들어오지 않았던 중공업의 경관을 이제야 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와 다른 관점에서 산업 경관을 보는 것이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 바로 ‘소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세계와 연결해주는 고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란 복잡하게 얽힌 물질의 얼개로 돼 있다. 그 위에 담론과 표상들이 얹혀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 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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