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도착해 오히려 죽어가는
어디나, 아무나의 도시 자서전
“사람들은 살기 위하여 여기로 오는 거야.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서 죽겠다는 거 같은데”
『말테의 수기』
스스로를 포박한 포로, “바람의 오랜 섭정에 나는 부역의 무리가 되어버렸다”
신용목 시인의 세번째 시집 『아무 날의 도시』가 출간되었다. 그러나 그는 예의 모습을 버린 그리하여 어쩌면 그를 기다리던 독자들을 실망시킬 수도 있는 다른 모습으로 찾아왔다. “농경문화의 서럽고 아름다운 퇴적층들을 탐사”하던 시인은 이미지를 적재하고 묘사로 압축하는 면모는 여전하지만 그 내용은 도시적인 것과의 정면대결 속에서 단련된 이미지들, “꽁무니에 바람 구멍을 달고/달아나는 풍선”이나 “빵 봉지 날리는 골목”을 지나며 “살아 있다는 당위”를 살핀다. 창을 열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오늘을 견디며 “아픔으로만 살아 있는 것”도 있다는 식의 존재론을 펼친다. “얼굴에 어둠을 묻힌 채” “나는 어둠을 그렇게 믿는다”는 시어들은 그가 자신이 처한 황량하고 적막한 시공간 안에서 시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가늠케 한다.
또 “나는 아무도 읽지 못할 문장”이라는 선언처럼,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어느 한 문장도 쉽게 놓아주지 않고 비틀고 위치 지우며 자신의 시가 쉽게 소비되는 일을 막는다.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타자에 대한 넘치는 사랑만은 여전하여 시인은 줄곧 고통스러워하며 비겁해지려고 한다. 그가 그렇게 하는 순간 우리는 덜 고통스럽고 덜 비겁해진다. 이는 스스로를 포박하여 “수용소에서/줄지어 밥을 타러 가는 이유”를 이해하는 상실의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시인만의 귀한 자질이다. 평론가 신형철은 이것이 서정과 사회가 만나는 동시대의 중요한 지점이 될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번 시집이 말하고 있는 것의 무게와 그것을 표현하는 기예의 깊이를 옹호하며 덧붙이건대, 이제 그는 동세대·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시인 중 하나다. ‘서정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과 어디에서 어떻게 어디까지 만나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게 될 때 누구도 이 시집을 건너뛰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시집은 그 어느 세계에나 있을 비인간적인 도시가 낳은, 그 어느 누구의 것보다도 정교한 이미지들의 절박한 항의다. 이 포로가 해방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_신형철(문학평론가)
도시-폐허, “나는 이 도시를 알고 있다”
우리는 ‘도시’라는 생계밀착형 공간에 살면서 하루하루 낯익은 풍경을 잃어가는 상실을 체험한다. 이 시집을 읽으면 시 속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데, 그 이유는 낯설게만 느껴지는 전경이 바로 자신의 터전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맹인의 눈으로 맹목의 도시를 살며, “보이는 것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않는” 무덤 같은 곳에서 부음을 전하며 사는 모습을 집요하게 담는다. 시어들은 신문 사회면에서 볼 법한 언어를 그대로 가져옴으로써 일상어의 낯섦과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평범한 단어가 울림을 갖게 되는 것은 물론 시인만의 능력이 아닐까. “고요가 순간을” 찔러 그 고요함을 알리듯 일상 언어가 갖는 무시무시함을 시인은 끊임없이 부각시킨다. 이것은 시인이 폐허 속에서 폐허를 지켜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식당 간판에는 배고픔이 걸려 있다 저 암호는 너무
쉬워 신호등이 바뀌자
어스름이 내렸다 거리는 환하게 불을 켰다
약국 간판에는 절망이 걸려 있다 _「아무 날의 도시」 부분
안경을 끼고서도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맹목의 도시에서 눈먼 자와 눈뜬 자의 경계는 없다. 배고픔이거나 상처이거나. 하지만 폐허뿐인 이 도시에서 그래도 시인은 고백한다.
사랑해 마음의 박물관에 진열되는 고백으로부터 _「얼굴의 고고학」 부분
비관이라는 구원의 또 다른 방식, “나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그저 폐허뿐인 도시에서 구원이 가능할까. 이번 시집의 특징 중 하나는 끝나지 않은 듯 끝을 맺는 시가 많다는 것이다. 결구들을 모아놓으면 시인은 끝나지 않을 이 생과 도시의 삶을 쉼 없이 되읊는 듯하다. 그리하여 이 생과의 계약이 오래 아프리라는 것을 감내하려는 노고가 엿보인다.
첫번째도 두번째도 세번째도 다 돌고 나면 겨울은 공터만 남겠지요. 트로피처럼 바닥에 놓인 검은 모자와 _「공터의 달리기」 부분
한 남자의 퇴장과 암전,
그리고 텅 빈 무대에서 _「하지만 이해해」
인간이라는 거푸집에서 뜨거운 쇳물과 끓고 있는 피를 _「죽은 자의 노래로부터」
신형철은 이 시집은 “그 어느 세계에나 있을 비인간적인 도시가 낳은, 그 어느 누구의 것보다도 정교한 이미지들의 절박한 항의”라고 말하면서, 이 포로가 해방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지점은 자신의 암담한 체현들을 “아무 날의 도시” 속 일상으로 밀어 넣는 시인의 ‘견딤’의 에너지를 읽어낸 것이리라. 아무 날의 오늘과 내일을 사는 사람들에게 시인의 이 에너지가 전해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