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땀 흘려 세운 나라, 동성애로 무너진다?”
어째서 성소수자 혐오는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가
한국사회 진보의 바로미터, 퀴어
반퀴어 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살펴보다
“동성애에 반대하느냐.” 이 말이 정치인의 도덕관을 묻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된 지 오래다. 평소 인권과 개혁을 내세웠던 정치인들도 이 말에 “당연히 반대한다”고 답하며 입장을 바꿔버린다. 자유와 평등이 인간의 보편적 권리라는 선언이 무색하게 성소수자(퀴어)를 향한 혐오는 여전히 공기처럼 떠돌고 있다. 단적으로 지난 열아홉 번째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퀴어들과 그 지지자들이 함께 축제를 만들어가는 동안, 광장을 에워싼 폴리스라인 밖에 자리 잡은 이들은 있는 힘껏 “동성애는 죄악”을 외치며 축제를 비판했다. 이들은 ‘반퀴어 운동’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력화하면서 “피땀 흘려 세운 나라, 동성애로 무너진다”는 구호 아래 소수자 혐오를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처럼 소수자 혐오가 곳곳에서 부각되는 지금, 한국사회 진보의 최전선에 자리한 퀴어 이슈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 나왔다. 『퀴어 아포칼립스: 사랑과 혐오의 정치학』은 반퀴어 운동을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 발화의 주체로 조명하고, 이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한국사회의 변화를 모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 책은 보수 개신교회의 반퀴어 운동이 형성된 배경과, 겉으로는 단일해 보이는 반퀴어 운동이 드러내는 균열을 살핀다. 특히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사랑 대 혐오’의 구도 아래 묻힌 개개인의 얼굴이다. 저자는 퀴어문화축제를 비롯해 다양한 현장의 퀴어들을 인터뷰하면서 퀴어 그리스도인, 탈동성애자 그리스도인, 반퀴어 운동에 저항하는 그리스도인 등 ‘퀴어 대 반퀴어’라는 구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들을 조명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주장에 맞서기 위해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랑과 혐오의 정치학을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야기에 그칠 뿐이고 더욱 진보된 미래를 전망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퀴어가 갈수록 우리 사회에서 더 많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이들을 향한 혐오와 비난도 더욱 강해지고 있다. 퀴어 페미니스트의 관점으로 한국사회의 퀴어 혐오를 성찰하는 『퀴어 아포칼립스』는 퀴어가 한국사회 진보의 바로미터임을 드러내면서 퀴어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반퀴어 운동을 주도하는 보수 개신교회,
변화의 가능성은 있는가
한국사회의 퀴어 혐오를 살펴보는 데 있어 보수 개신교회는 주요한 행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개신교회는 성경에 바탕을 두고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를 비난해왔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보수 개신교회가 처한 상황을 살폈을 때에야 왜 이들이 반퀴어 운동에 앞장서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지난 20년 동안 개신교회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 ‘가나안’ 신도의 증가, 독선적인 믿음에 대한 신도들의 반발, 교회 간의 치열한 확장 경쟁 등으로 위기에 직면했다. 이처럼 지속적인 성장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보수 개신교회는 반퀴어 운동을 통해 새로운 동력을 얻고 교세를 회복하고자 했다. 이들의 실천은 위기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성찰하지 않은 채 새로운 적대자를 구축하려 한다는 점에서 반공주의라는 기존의 관행을 답습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퀴어 운동의 지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이 단일한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수 개신교회 내부에는 크게 반동성애 집단, 탈동성애 집단, 사회참여적 복음주의권이 존재한다. 반동성애 집단은 동성애자 개인과 동성애 모두를 공격하고 노골적인 혐오 발언을 퍼붓는다. 반면 탈동성애 집단은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는 입장을 견지하며 죄(동성애)와 죄인(동성애자)을 분리한다. 한편 보수 개신교회 내에서도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는 복음주의권은 침묵과 외면을 통해 퀴어 혐오를 용인했다.
그럼에도 개신교회 안에서 퀴어 이슈를 다루는 방식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동성애는 죄지만) 동성애자를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논의가 교회 안에 퍼지고 있고, 보수 개신교회와 다른 입장을 갖는 교회들은 ‘퀴어와 함께하는 그리스도인’ 부스를 열어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기도 한다. ‘동성애에 동조하는’ 목회자를 추방하는 교단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변화가 개신교회 전반을 바로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퀴어를 향한 비난으로는 위기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은 교회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퀴어 운동과 반퀴어 운동이 사랑을 두고 벌이는 동상이몽,
‘혐오에 맞서는 사랑’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퀴어들이 퀴어문화축제를 비롯해 다양한 장에서 모습을 드러냄에 따라 반퀴어 집단의 위기감은 더욱 강화되었다. 위기감은 직접행동으로 나타났다. 2014년 미국 대사관이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하자 보수 개신교회의 주도 아래 미국 대사관 앞에서 반미시위가 벌어진 것이 단적인 예다. 이들은 “미국 조기유학길은 동성애 자녀 양성의 길인가” 등의 격양된 표현을 쓰며 미국 대사관이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것에 항의했다. 여기서 반퀴어 단체는 동성애를 허용하는 ‘타락한’ 미국을 한국의 미래로 제시함으로써 지지자들의 두려움을 자극했다. 특히 미국 연방 대법원이 결혼을 남녀 간에 이뤄지는 것으로 한정한 결혼보호법에 위헌 판결을 내린 데 따라, 반퀴어 운동은 미국을 한국이 도달해서는 안 될 미래로 상정했다. 이는 한국이 미국을 넘어 더욱 평등한 사회로 변화해야 한다는 퀴어 운동가의 미래 인식과 극히 대조되는 것이다.
여기서 반퀴어 운동과 국가기관, 퀴어 운동은 서로 다른 미래상을 설정함으로써 서로 경합한다. 반퀴어 집단에게 한국사회의 미래는 ‘소돔과 고모라’라는 이름의 종말이다. 이들은 퀴어가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없으며 그 때문에 퀴어가 존재하는 사회 역시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국가기관은 퀴어 이슈를 현재가 아닌 미래의 문제로 연기시키면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한다. 이 집단들에 맞서고자 할 때 퀴어 운동이 마주하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국가기관의 무관심에 맞서 퀴어의 권리를 지금 여기에서 실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퀴어 집단이 내세우는 이성애규범을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특히 이성애규범을 해체하는 것은 퀴어 정치학에 있어 무척 중요하다. 퀴어도 행복하고 도덕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며 주류에 편입하는 것은 반퀴어 운동이 내세우는 보수적 규범에 순응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퀴어에 우호적인 흐름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어간다는 퀴어 운동가의 발언은 퀴어의 미래를 낙관하는 동시에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규범을 그대로 따라갈 위험 또한 간직하고 있다. 보수 개신교가 말하는 ‘종말’이 지배 규범의 붕괴라면, 그 종말은 기존의 규범을 해체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때 정치적으로 주요한 쟁점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말할 때 반퀴어 집단은 사랑이라는 보편적 감정에 호소한다. 하지만 그 속에는 ‘죄인’인 성소수자들을 ‘사랑의 이름으로’ 구원하겠다는 의도가 들어 있다. 이 때문에 저자는 기존의 규범 안에 자리한 사랑이 특정한 누군가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한, 단순히 ‘혐오에 맞서는 사랑’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반퀴어 운동의 주장을 세심하게 읽어내고 ‘혐오에 맞서는 사랑’을 정치적인 맥락에서 재구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퀴어 운동은 인정투쟁을 넘어 더 나은 미래를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퀴어 대 반퀴어라는 대립 구도를 넘어
다양한 정체성을 긍정하는 미래를 향해
사랑의 정치학은 이론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것이기도 하다. 특히 퀴어문화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