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연필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질문이다” 책상 위에 이것 하나쯤은 놓여 있을 것이다. 길이는 저마다 다르지만 막 깎은 것이라면 20센티미터 정도일 테고, 손가락 하나보다도 얇은 두께에, 보통은 검은색이지만 빨간색이나 파란색일 수도 있으며, 끝에는 지우개가 달려 있기도 하다. 세상에 수많은 필기구가 등장한 지금까지도 이것은 학교에서나 문방구에서 어김없이 볼 수 있으며, 이것 없이는 수많은 미술작품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발명되기 전까지 학자, 건축가, 목수, 사무직 노동자 등은 컴퓨터처럼 백업해둘 수도 없는 종이 위에 잉크를 쏟는 바람에 머리를 수없이 쥐어뜯다가 끝내는 작업을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경이로운 방법으로 이 정리를 증명했지만 책 여백이 너무 좁아 여기 옮기지는 않겠다”고 쓴 페르마에게 이것이 없었다면, 그는 이런 휘갈겨 쓴 듯한 메모조차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휴대하기 간편할뿐더러 나중에 얼마든지 지울 수 있기 때문에 책 여백에 끄적거리기에 더없이 적당한 이것은 바로 ‘연필’이다. 그렇지만 책상 위에 놓인 물건들 중 연필만큼 소홀히 취급되는 것도 없는 듯하다. 어쩌면 누군가는 연필이 너무나도 흔하고, 값싸며, 우리가 내뱉는 말만큼이나 일상적인 물건이 됐기 때문이라고 말하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연필의 기원이나 역사가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사실은 의아함을 남긴다. 우리는 연필이 무엇인지, 연필을 어떻게 쥐는지는 자연스럽게 알지만, 누가 흑연을 연필심으로 만들 생각을 했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나무 자루 안에 끼워 넣을 생각을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다른 누군가는 연필이 향수 어린 소품이나 구식 필기구가 됐기 때문이라고 말하겠지만, 연필이 아닌 애플 ‘펜슬’을 사용하는 시대에 이르러서도 우리는 여전히 HB 연필이나 4B 연필을 택하듯이 진하기를 조절하고, 선 두께를 조절하며, 지우개로 필기 자국 위를 문질러 쓱싹쓱싹 지운다. 다른 많은 공학적 산물이 그러하듯이, 최초의 것들은 이렇게 소리 없이 사라진다. 이 책 《연필》은 600여 쪽에 걸쳐 바로 이 연필을 들여다본다. 처음 발명된 이래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 경이롭고 정교한 발명품, 그렇지만 지난 수백 년간 우리 책상 위에 혹은 손가락 사이에 놓이면서 하찮은 취급을 받게 된 이 작고 가느다란 도구를 말이다. 연필 백과사전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 책은 1989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됐고, 1997년 한국에 번역 출간됐다가 절판됐다. 이후 20여 년 동안 연필을 다룬 책이 여러 권 출간됐지만, 《연필》만큼 연필의 탄생에서부터 공학적 발전 과정, 산업적 맥락 등을 넓게 아우르면서도 깊이 파고든 책은 없다. 말하자면 이 책은 연필에 관한 한 가장 고전적인 책이면서도 여전히 가장 현대적인 책이다. 바로 연필 자신이 그러하듯이. 〈편집자의 책 소개〉 물론 내 책상 위에도 연필이 몇 자루 있다. 교정지를 들여다볼 때는 빨간 펜을 사용하지만, 빨간 펜을 사용하기도 전 단계, 이를테면 ‘책이 될지 안 될지’를 알 수 없을 때는 연필을 쓴다. 초고를 읽으면서 떠올린 생각, 질문, 빼거나 더하면 좋을 내용 등을 메모해놓기 위해서다. 똑같이 빨간 펜을 써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되면 수정 테이프를 한 달에 20미터쯤은 써야 할지도 모른다. 초고에 대한 인상은 그만큼 자주 바뀌기 때문에. 책이 될 것이 분명한 원고 앞에서도 연필을 집어들 때가 있는데, 쉽게 풀리지 않는 비문들,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한 문장들, 혹은 수정해도 될지 판단이 서지 않는 문장들을 마주칠 때다. 말하자면 빨간 펜은 돌이킬 수 없는 수정이다. 여차하면 수정 테이프로 덮어버릴 수도 있지만, 아직 현대 기술은 자국이 남지 않는 수정 테이프를 발명하지 못했다. 반면 연필은 아직 돌이킬 수 있고, 바꿀 수 있고, 더 좋아질 수도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건 같은 원고를 세 번에 걸쳐 읽어나가며 더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수정을 거듭하는 편집 작업을 닮았고, 지식을 계속해서 갱신해나가는 독서 행위와도 닮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서부터 존 스타인벡,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토머스 울프 등 연필을 좋아한 작가들이 많았던 것도 꼭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