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철학에서 예술은, 철학을 위해 실질적으로 유효한 효과를 발생시키는, 철학을 위한 '실험'이다. …안 소바냐르그의 이 책은 단순히 한 철학자의 예술에 대한, 예술을 위한 주석, 해석들이 아닌, 예술을 통한 한 철학의 구체적인 발생, 생성의 운동을 보여주고 있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들뢰즈의 사유에서 '예술'이란 무엇이었나
들뢰즈(G. Deleuze, 1925-1995) 사후 불과 십사 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푸코의 말대로 오늘날은 '들뢰즈의 세기'가 되었으며, 이는 한국출판계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들뢰즈의 저작뿐만이 아닌 들뢰즈에 관한 책 역시 무수히 쏟아져 나왔고, 각계각층에서 들뢰즈는 새로운 담론의 예시자로서, 사유의 실험 현장에서 끊임없이 인용되는 주요 목록이 되었다.
들뢰즈는 니체적 예술충동을 창조하는 사유의 모티브로 삼았으며, 그의 철학체계에서 예술이 담당한 역할은 결정적이다. 이는 <프루스트와 기호들>등 들뢰즈 저서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삼분의 일 이상이 모두 예술작품 분석과 관련되어 있다. 들뢰즈는 실제로 철학적 저술 외에 자허-마조흐, 카프카, 프루스트, 아르토, 루이스 캐럴, 카르넬로 베네, 에밀 졸라, 미셸 투르니에, 베케트, 클로소프스키 등의 작가에 관한 일종의 철학적 문학비평과, 프로망제와 베이컨 등의 화가에 관한 주목할 만한 논문과 비평서, 그리고 고전주의, 네오리얼리즘 등을 아우르는 영화에 관한 기념비적인 저서들을 남겼다.
이 책 <들뢰즈와 예술>은 프랑스의 저명한 소장 철학자로서 들뢰즈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전방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여성 철학자인 안 소바냐르그가 들뢰즈의 전(全) 저작 속에서 들뢰즈와 '예술'이 조우한 지점, 즉 들뢰즈 사유의 생성지대를 탐구해낸, 본격적인 들뢰즈의 예술철학론이다. '예술로 철학하기, 철학으로 예술하기'라는 실천의 새로운 장을 보여준 들뢰즈, 과연 그의 철학적 사유에서 예술이란 무엇이었나.
문학 비평에서 예술에 대한 정치적 함의들에 대한 분석으로,
그리고 이미지의 기호론으로
안 소바냐르그는 예술의 문제에 대한 시기구분을 통해 들뢰즈 철학 체계의 운동학을 세우기 위한 필수 요소를 얻어낸다. 초기 저서들에서부터 <차이와 반복>(1968)에 이르기까지, 문학비평에 집중해 있던 들뢰즈는 과타리와의 공저인 (1972)에 이르러 사유의 실천론적 전환을 맞는다. 담론적인 것에서 비담론적인 것으로의 이행, 의미론적 해석에서 기호론으로의 이행과 더불어 해석 비판, 다양체 등에 대한 개념이 중요해진다. 이러한 예술에 대한 정치적 함의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1980년대를 전후하여 <천 개의 고원>(1980)에 이르러서는 예술, 과학, 철학의 공존을 모색하는 창조의 기호론, 이미지의 기호론으로 나아간다. <의미의 논리>(1969)에서 들뢰즈 예술철학의 기획이 완성되는 <감각의 논리>(1981)로 나아가기까지, 아르토의 기관없는 신체라는 개념과 함께 의미의 해석이 아닌 '감응'의 행동학, 힘의 포획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이미지 기호론으로의 이행 과정을 저자는 매우 흥미롭게 탐사하고 있다.
이처럼 새로운 예술과 접촉하여 변형된 지대들과 들뢰즈 사유의 생성 지점들을 하나의 역동적 지도 제작으로 포획해내는 저자의 꼼꼼하고 실증적인 분석력에 따르면, 들뢰즈에게서 예술이란 곧 지각 불가능하고 식별 불가능하고 비인칭적인 힘들에 대한 포획, 즉 언어적 담론적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미지의 기호론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들뢰즈 철학 전체를 횡단하는 예술과의 다양한 조우의 흔적들을 꼼꼼히 살피면서, 어떻게 들뢰즈의 철학적 개념들 기관없는 신체, 욕망하는 기계, 동물-되기, 리좀, 탈주선 등 이 예술이 제기한 질문들과 더불어 새로운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열었고, 더 나아가 사회적 힘들의 배치와 생성의 지점들을 탐색하는 실천론적 가치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사유하는 이미지로서의 예술철학의 방향을 제시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들뢰즈의 예술론을 요약하는 '기호론'과 이 기호론의 논리적 귀결이라 할 '이미지'의 의미와 역량들을 명확히 설명하면서 예술의 창조적 기능과 철학과의 관계를 밝혀낸다. 이 책에서는 난해한 용어에 대한 번역어가 주는 혼란스러움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하여 색인에서 각 용어마다 원어를 모두 실어 놓았다. 3년에 걸친 번역 작업과 교정 작업을 거쳐 나온 이 책은, 예술이 어떻게 사유를 촉발시키고 새로운 철학적 실험이 될 수 있는지를, 가장 정확하게 들뢰즈 식으로 이해해 볼 수 있는 안내자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