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문장이다
계엄과 탄핵, 슬픔과 분노, 다정함과 고마움
따뜻한 빛처럼 위로가 되는 황정은의 작고 단단한 기록들
정제된 문장과 깊은 감각으로 우리 시대를 응시해온 소설가, 지금 한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문장을 쓰는 황정은이 에세이 『작은 일기』로 돌아왔다. 『百의 그림자』 『디디의 우산』 『연년세세』 등으로 깊은 사랑을 받아온 그는 문장을 아껴 쓰는 작가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좀처럼 에세이를 쓰지 않지만, 모두가 말을 잃고 마음이 흔들리는 시기에는 누구보다 먼저 진솔하고도 단단한 목소리로 우리 곁에 다가왔다. 전작 『일기日記』(창비 2021) 이후 4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에세이집은, 현직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라는 초유의 사태 이후를 배경으로 삼는다. 요동치는 격랑의 시간 속에서 작가는 매일의 삶을 일기로 기록하며 광장과 집 안, 거리와 책상 앞을 쉼 없이 오갔다. 이 책은 우리 가장 어두운 날들을 견디며 지켜낸 생활과 사유, 그 가운데 가만히 솟아오른 깊은 마음을 담아낸 ‘생활의 기록’이자 ‘시대의 문장’이다.
“놀라운 사람이 이렇게 많다”
사회적 격랑과 사적인 일상 안에서도 피어나는 따뜻함
12월 3일, 갑작스레 발표된 계엄령. 그와 동시에 거리로 쏟아진 사람들의 분노와 외침 속에서 작가의 일기는 시작된다. 집회 현장의 매서운 추위와 고립감을 견디며, 불확실한 시간 속에서도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작품을 쓰고 동거인을 기다리는 마음. 『작은 일기』는 그렇게 사회적 격랑과 아주 사적인 일상이 뒤섞인 하루하루를 기록한다. 책의 첫장 「그 밤에」는 불안과 긴장 탓에 무너져 내린 일상을 다룬다. 황정은은 거리로 나가 탄핵을 외치는 시민들과 함께한다. 그러나 광장은 언제나 안전한 연대의 공간만은 아니었으며, 분노한 집단 안에서 소수가 침묵을 강요받기도 한다. 작가는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정상성’의 폭력을 목격하고, 그 안에서 느낀 소외와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자매들과의 따뜻한 연대, 그리고 광장의 변화하는 얼굴에서 작가는 서로를 지키기 위한 책임감을 다시 새긴다. 세상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쓰고 말하며, “또 가죠 뭐”라는 말로 삶을 버틴다. 「너무 고마운 사람」에는 계엄 해제 이후에도 해소되지 않는 분노가 담겨 있다. 말할수록 가벼워지는 현실, 말해도 소용없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들 속에서, 사람들 사이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그러나 광장에서는 여러 주체가 어우러진 새로운 연대가 태동하고, 남태령에서 밤을 지새운 사람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마음들이 세상을 바꾸기 시작한다. 십대, 이십대, 삼십대 여성이 주축이 된 광장은 이전과는 다른 정치적 감수성과 민감함으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작가는 이 격변의 시간을 끝까지 기록하며, “놀라운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만세, 하고 부르면」에서는 쏟아지는 뉴스에 소모되는 감정과 깊은 피로가 절절하게 느껴진다. 이는 계엄 이후 대다수 국민이 경험한 피로감이기도 하다. 탄핵 이후에도 체포되지 않는 권력자와, 이를 지지하거나 방조하는 세력들의 ‘악의 평범함’ 앞에서 삶의 감각은 날로 무뎌진다. 그러나 ‘키세스단’으로 대표되는 시민들의 밤샘 연대는 여전히 깊고 놀랍고 고맙다. 동시에 극우 세력의 증오와 폭력이 노골적으로 분출되는 현실은 작가에게 더욱 내밀하고 개인적인 폭력처럼 다가온다. 그럼에도 작가는 매일 원고를 쓰고, “가장 빛나는 것”을 들고 다시 일어서려 애쓴다.
“내가 이 세계를 깊이 사랑한다”
말할 수 없어 쓰고, 울 수 없어 기록한 시간들
1월 중순 어느 새벽, 작가는 「물 떨어지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공수처가 윤석열을 내란 혐의로 체포했지만, 서부지법 습격 사태가 벌어져 불안과 무력감은 깊어졌다. 계속되는 사건과 뉴스를 접하며, 사회가 ‘상식과 헌법의 오염’으로 망가져간다는 자각에 호흡곤란까지 겪으며 내면도 흔들린다. 헌법재판소에서 윤석열 탄핵 심리가 이어졌지만, 그는 초법적이고 불합리한 절차로 풀려나버린다.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혼돈은 극에 달했다. 식물을 돌보고 좋은 책들을 읽으며, 아름다움과 평온을 찾고자 노력해보지만 여전히 마음속의 혼란은 가라앉지 않는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안정과 회복에 관한 이야기다. 사회적 상황은 혼탁하지만, 작가는 몸과 마음을 돌보며 삶을 붙든다. 필라테스 수업에서 ‘제대로 눕는 법’과 ‘호흡하는 법’을 배우는 동거인을 통해 스스로의 몸에 대해 생각해보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반복되는 산불과 싱크홀 사고, 그리고 탄핵 정국의 지체는 작가의 심신을 지치게 하지만, 그 속에서도 ‘나무 보러 가고 싶다’는 갈망처럼 삶을 향한 다정한 시선이 군데군데 드러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서로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목격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알아보고 눈치 채는 마음」에서는 헌재의 탄핵 선고를 앞둔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작가는 이웃과의 작은 연대, 광장에서 마주한 다정한 순간들에 감응하며 버텨낸다. 광장 한복판의 방석과 추로스, 팔뚝질과 노란 깃발 같은 구체적인 장면들이 그에게 ‘냉소할 수 없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고, 끝내 함께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애정을 되새기게 한다. 독서 중인 문장들에 기대어 작가는 존중, 가능성, 조용한 감응을 붙잡는다. 탄핵심판 선고일이 발표된 날, 뜨거운 환호에 호응하며 “이제 뭐가 되든 써야지”라고 다짐해보기도 한다. 세상을 향한 감정은 매순간 요동치지만 작가는 끝내 말한다. “내가 이 세계를 깊이 사랑한다”라고. 이 고백은 가능성을 향해 밀고 나가는 글쓰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장 「세상의 모든 아침」은 대통령 탄핵 이후를 다룬다. 4월 16일 세월호참사 기억식을 다녀온 작가는 11년 전의 고통과 지금의 무력함이 겹쳐지는 시간을 지나며, 목격의 책임과 두려움을 마주한다. 팽목항에 끝내 가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며, 작가는 관찰자의 시선과 글쓰기의 윤리에 대해 고민한다. 여전히 광장에서 이어지는 연대와 기억, 슬쩍 서로를 알아보는 시민들의 다정한 감각이야말로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가 된다.
이 책은 특정한 사건을 작가의 시각에서 다룬 인상적인 정치적 논평이기도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혼란과 상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계속되는 삶의 감각에 관한 기록이다. 또한 2024년 겨울의 광장에서, 2025년 봄의 부엌에서, 매일을 견뎌낸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려는 하나의 시도다. 드물게 에세이를 발표해온 작가인 만큼 이번 책은 독자들에게 더욱 특별한 감응을 남긴다. 사회적 현실을 정제된 언어로 사유하며, 한 사람의 일상으로부터 시작된 기록이 어떻게 모두의 감정에 가닿는지를 보여준다. 『작은 일기』는 울분의 시대를 건너온 한 작가의 조용하지만 단단한 가장 문학적인 응답이다. 이 책은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 할 그날들의 감정,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다짐이다.
부디 이 책이 각자의 ‘작은 일기’로 이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