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 혹은 시인으로서의 시작(詩作)
불행 속에서 희망을 상상하는 심보선의 시 세계
심보선의 세번째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 2008)와 두번째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 2011)으로 대중과 문단의 주목을 한 번에 모아온 시인이 6년 만에 묶은 새 시집이다. 평론가의 해설을 덧붙이는 대신 시인이 선별한 에세이 「당나귀문학론」을 덧붙였다. 부록의 형태로 붙은 이 산문은 『오늘은 잘 모르겠어』을 탐닉하는 심보선의 독자들에게 독특한 재미를 더해줄 것이다.
사회학자이자 시인인 심보선은 불행한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긍정적 결말을 끌어낼 수 있는 언어를 풀어놓는다. 끊이지 않는 삶의 슬픔과 고통, 어둠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가운데 심보선은 슬픔 사이 찰나의 순간, 눈앞에 없는 것들의 존재를 포착해낸다. 세상은 고통과 슬픔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희망이 남아 있기에 삶이 그저 슬픔으로 끝나지 않도록 또 다른 가능성을 제안하는 셈이다. 새로운 희망을 상상할 수 있는 세계, 심보선이 시 언어로 지은 유예의 공간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우리의 삶이 행복을, 사랑을 찾을 수 있도록……
가능성을 꿈꾸는 시인의 기록
지지난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
오늘은 잘 모르겠어
―「오늘은 잘 모르겠어」 부분
허공으로 남은 ‘당신’을 떠올릴 때, 한 번도 낳아본 적이 없는 아이에 대해 생각할 때, 장남인 화자가 ‘형’의 존재를 상상할 때, 즉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두고 화자는 “나는 모른다”(「축복은 무엇일까」)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확실한 것이 없는 세계, 어제는 확실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잘 모르겠는 그러한 불확정성의 공간은 유동적으로 변화하며 때로는 부정적 결말로 나아가기도 한다.
나는 우리에게 벌어진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어요.
―「예술가들」 부분
심보선의 시에서 화자는 언제나 연인과 이별 중이고, 사랑에 실패하는 중이고, 삶은 죽음을 향해가는 중이다. 심보선은 이러한 상황을 그러니까, 이 상황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째로 받아들이는 작업을 1차로 수행한다. 사회학자인 그에게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중”이라는 단어이다. 심보선은 사라지고 있는 “중”에 있는 그 과정을 시적 언어로 기록하는 자이다. 즉, 눈앞에서 사라진 존재를 글로 기록하고, “십오 초”라는 짧은 찰나 혹은 공백에 놓인 순간들을 잡아내는 중이다. 온전히 없던 일이 될 수도 있던 것들, 완전히 사라져버릴 수도 있던 것들을 사회학도의 눈으로 그리고 시인의 손으로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그렇기에 이 시집 안에서 헤어짐의 고통도 사라지는 아픔도 전부 과정의 일부이자, 다른 어딘가로 향하는 통과의식의 하나로 자리한다. 소멸이 회생불가능한 지점까지 가닿기 전에, 이별이 영원한 끝이 되어버리기 직전을 포착하는 심보선의 시 세계는 그 안에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을 그려낸다. 불행이 불행으로 끝나지 않기를, “우리가 헤어질 뻔해도 끝내 헤어지지 않고 결혼할 수 있도록”(「카르마」), 심보선의 시적 언어가 수행하는 가능성의 시공간은 현재 진행 중이다.
너-나, 세계가 서로에게 손을 뻗을 때
우리의 세계는 끝나지 않고
이번 시집은 시 「소리」로 시작한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시구 “들어라”를 통해 독자들은 이 시에 수신자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들어라”, 이후 뒤따라오는 청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랑한 것을 모두 증오했기에 자신까지 혐오하게 된 장자” “거울 앞에서 얼굴의 얼룩을 노려보는 처녀” “한 개의 뼈만 남은 거대한 무덤” 등이다.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이 화자가 청자로서 소환하는 자들이다.
내가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자
그는 죽은 이들의 이름을 보여주고
그중에 하나를 고르라 했다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것이 그의 이름이라 했다
같은 목록에서 이제 내 이름을 찾아보라 했다
그날 거기서 어떤 변화가 시작됐다
―「근육의 문제」 부분
알려졌다시피 심보선은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회 운동의 현장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왔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시집 속에도 고스란히 투영되곤 하는데,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정비 중 사망한 소년에 대한 시 「갈색 가방이 있던 역」, 쌍용차 해고 노동자 문제를 다룬 「스물세번째 인간」 등에서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심보선은 단순히 사건의 전말을 드러내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또 다른 누군가를 소환하는 방식으로 시를 전개해간다. 상대의 이름을 묻는 것, 즉 누군가에게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삶으로 타인을 끌어들일 때 그 타인은 자본주의 안에서 아스라히 사라져간 “죽은 이들”의 이름 중 하나로 자신을 호명해줄 것을 요청한다. 즉, 심보선이 시집을 열면서 “들어라”라는 시구로 수많은 사람들(그의 삶의 결로 보았을 때 이들은 대부분 자본주의 아래에 속박당한 자들일 것이다)을 소환할 때, 그리고 그들이 “죽은 이들”로서 그 스스로 시인의 소환에 응할 때, 우리는 심보선의 시 세계 안에서 서로서로 연결되는 고리를 발견한다. 이는 단순히 내가 너에게 손을 뻗는 일을 넘어, 너가 나에게 닿으려는 의지, 동시에 너와 너가, 더 크게는 나와 너, 그리고 세계가 서로에게 맞닿음으로써 언어라는 이름 아래 지어진 공동체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심보선의 시에서 수신자가 설정된 듯한 느낌들, 비단 “들어라”라는 구체적인 지시뿐 아니라 이야기를 풀어놓는 복화술사의 존재(「복화술사의 구술사」) 혹은 서간 형식으로 진행되는 시(「브라운이 브라운에게」)들은 심보선이 꾸려놓은 언어라는 공동체 안에서 듣는 자와, 말하는 자 사이의 연결 고리가 시 전체의 분위기를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조짐, 희미한 움직임이다
바통을 주고받는 이름 없는 주자들이다
그 바통 위에는 ‘끝나지 않았어’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끝나지 않았어」 부분
“끝나지 않았어”라는 그의 의지가 담긴 시구처럼, 불행이 꼬리를 물고 따라와도 우리가 서로에게 바통을 쥐여주듯 서로에게 가닿을 수 있다면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 서로가 서로의 말에 닿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불행으로만 점철되지는 않을 수 있다는 어떤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음을 시인은 그의 시를 통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