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시, 다시 열린 세계
새로 만나는 한국시의 역사, ‘창비시선_다시봄’ 시리즈
40여년간 한결같이 독자들과 함께해온 ‘창비시선’이 또 하나의 의미있는 기획을 선보인다. 기존에 간행됐던 시집 중에서 그 주제의식과 언어의 현재성이 여실한 시집을 가려 뽑아 지금의 독자들과 새롭게 나누는 시리즈‘창비시선_다시봄’이다.
1975년 3월 신경림 시집 『농무(農舞)』를 시작으로, 창비시선은 2019년 10월 현재 436권에 달하는 시집을 출간하며 우리 시의 문학적 고투와 성과를 오롯이 담아내왔다. 서정의 언어로, 저항의 외침으로, 다양성의 목소리로 이어져온 창비시선은 유장하고 넓은 한국시의 강물이 되었다. ‘창비시선_다시봄’의 출간은 이 문학적 물길과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지금 여기로 이어진 한국 현대시의 본류를 살피는 일이자 아직 그곳에 온전히 머무르고 있는 맑고 다채로운 미감을 현재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기획이다.
시리즈의 시작을 함께한 시인들은 오래전에 선보인 작품을 펼쳐두고 애정과 고심으로 퇴고를 거듭하며 시간의 더께를 털어내었고 그 소회를 책에 밝혀두었다. 아울러 표지 디자인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포부를 담아 1966년 발간된 계간 『창작과비평』 창간호의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만들었다.
시인 강은교, 언어를 통해 사랑을 실현하다
‘창비시선_다시봄’ 시리즈는 강은교 시집 『벽 속의 편지』(창비시선 105, 1992)로 시작된다. 이 시집은 1968년 『사상계』로 등단한 강은교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으로 세상의 작고 사소한 기척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세련된 언어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애정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그에 머무르지 않고 언어를 통한 사랑의 실현으로 발전되게끔 한다. 세상의 억압이나 억울한 희생 따위의 소멸을 바라며, 동시에 하찮게 여겨지는 가치들의 혁명을 꿈꾸었던 시인의 좌절 섞인 열망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아프게 읽힌다. 우리를 위로하듯 시인은 다시 쓰는 ‘시인의 말’을 통해 “저물녘이면 언제나 희망의 연둣빛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일몰 옆엔 일출이 서 있으리니/아직 젊은이여/내부는 언제나 외부의 내부/이 고단한 행성 위에서”라 적는다.
우리 곁으로 돌아올 한국시의 얼굴들
‘창비시선_다시봄’ 시리즈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발간을 통해 켜켜이 쌓인 한국시의 지층을 탐지해나갈 것이다. ‘여성’ 서정시‘ ‘첫 시집’ ‘작고 시인’ 등 다양한 주제에 맞는 시집들을 엄선해 순차적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지성과 예술이 한데 깃든 한국 대표 시인들의 시집을 다시 살펴보며, 우리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삶의 비의(秘意)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창비시선_다시봄’을 통해 우리가 지녀온 시의 유산이 얼마나 풍요롭고 또한 현재적인지를 다시금 발견하고, 이전의 시와 지금의 시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