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사회와 압도적 체제에 짓밟혀 질식해 가는 현대인의 불안과 두려움, 아득한 절망……
카프카만의 독창적인 문체와 전율스러운 상상력으로 빚어낸 불멸의 단편들
법 앞에 문지기 한 사람이 서 있다. 시골 사람 하나가 와서 문지기에게 법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입장하는 걸 허락할 수 없노라고 말한다. 그 사람은 이리저리 생각해 보다가 그렇다면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럴 수는 있지만.” 하고 문지기가 말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안 된다오.” 문은 언제나 그렇듯이 열려 있고, 문지기가 옆으로 물러섰기 때문에 시골 사람은 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려고 몸을 굽힌다. 문지기가 그것을 보고는 웃으면서 말한다. “그렇게 마음이 끌리거든 내 금지를 어기고라도 들어가 보시오. 그렇지만 명심하시오. 내가 막강하다는 것을. 그런데 나로 말하자면 최하급 문지기에 불과하고, 방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문지기가 서 있는데 갈수록 막강해지지. 세 번째 문지기만 되어도 나조차 쳐다보기가 어렵다고.”―「법 앞에서」에서
■ 편집자의 말: 왜 이 작품을 소개하는가?
프란츠 카프카는 20세기 문학의 한 특징적 징후를 대표하는 작가다. 카프카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현대인의 삶,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인생의 미로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불안 의식과 구원에의 소망 등을 군더더기 없이 명료하고 단순한 언어로 형상화했다. 그래서일까? 카프카의 작품들은 상당히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추종자들을 낳았고, 그 행렬은 21세기에도, 무려 전 세계로 끊임없이 뻗어 나가고 있다. 그의 문학적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한 예는 독일의 『문예용어사전』 및 『독일어사전』에 ‘카프카적(kafkaesk)’이라는 낱말이 이미 오래전부터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쏜살 문고」로 출간된 단편집 『법 앞에서』에는, 독자들이 ‘카프카적인 것’에 (다소 고통스러운 과정일 테지만) 보다 쉽게 다다를 수 있도록 열네 편의 작품을 골라 담아냈다. 이미 「세계 문학 전집」으로 소개된 바 있는 표제작 「법 앞에서」 그리고 「판결」(카프카 스스로 만족해한 작품이다.)과 「굴」(이 작품은 카프카가 죽기 전에 원고들을 불태우도록 부탁했을 때, 유일하게 제외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을 비롯해, 시대와 불화하는 예술가의 전형을 보여 준 「굶는 광대」, 카프카 자신이 남긴 가장 솔직한 자전적 기록이라 볼 수 있는 「그」, 거대한 여운을 지닌 수수께끼 같은 잠언들로 이뤄진 「죄와 고통, 희망 그리고 진정한 길에 대한 성찰」 등에 이르기까지 새 작품과 기존의 글 들을, 새로운 번역과 편집으로 전부 한자리에 모았다.
불안하게 소용돌이치던 암울한 시대, 잔혹한 일상에 고통받던 한 영혼이 무시무시한 타인의 눈을 피해 남몰래 써 내려간 불안과 절망의 기록이 오늘날까지, 아니 지금 시대에 더더욱 절절하게 읽힌다는 건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그만큼 현재가 각박하다는 의미일 테니까 말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끊임없이 상대해야 할 압도적인 사회 체제, 근원적인 불안과 두려움…… 카프카의 작품은 인간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돋보기이자 현대 사회의 그림자를 비추는 거울로서 언제까지나 유효할 것이다. 이제 거대한 카프카 문학의 정수를 『법 앞에서』를 통해 좀 더 섬세하고, 진지하게 읽어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