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좀비와 코로나19 팬데믹 21세기는 ‘좀비의 세기’로 기록될 것이다. 가히 ‘좀비 현상’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분야와 장르를 막론하고, 사회와 문화 전반에서 좀비가 출몰하고 있다. <부산행>은 1,1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고, 드라마 <킹덤>은 전 세계에 K-좀비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오늘날 좀비는 영화, 드라마, 소설, 그래픽 노블, 게임, 웹툰 전반을 장악했으며, 이제는 학계에서도 좀비를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보고 있다. 좀비에 관한 연구가 언제 갑자기 일어날지 모르는 치명적 감염병에 대한 시뮬레이션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고 있듯이 전례 없는 팬데믹 시대를 맞아 좀비에 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유행과 이로 인해 손쓸 수 없이 파괴되고 망가져 가는 세계의 모습은 마치 좀비영화가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듯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 이외에도 대규모의 자연재해, 기후변화, 초미세먼지, 방사능 유출, 금융위기, 양극화, 테러리즘, 전쟁 등 현대사회가 처한 위기의 목록을 끝없이 열거할 수 있다. 좀비영화는 인류문명이 멸망하는 순간을 압도적 스펙터클로 재현한다. 금방이라도 스크린에서 뛰어나올 것만 같은 생생한 위협으로 나타나는 좀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임박한 파국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좀비영화를 보며 내가 사는 세계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며, 언제라도 멸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계의 종말이라는 묵시록적 공포와 불안감은 좀비의 유행을 견인하는 원동력으로 작동한다. ‘생활 속 거리두기’ 강화로 인한 관객 수 감소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K-좀비영화 와 <반도>가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공중파에서는 드라마 <좀비탐정>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이렇듯 세계가 처한 위기의 정도에 비례하여 좀비의 출몰은 잦아지며, 좀비는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의 정동을 양분 삼아 번성한다. 이 책에 따르면 좀비는 매 시대의 상황과 정동을 반영하며 가장 다채롭고 다양한 형태로 변용되어 온 괴물이다. 좀비는 사람들이 지닌 막연한 불안감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알레고리다. 저자는 좀비를 통해 한국사회의 오늘을 비판적으로 읽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다가올 미래를 예비할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좀비학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좀비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정초하고자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좀비는 인류의 타자에 대한 유구한 억압과 배제의 역사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좀비학은 무엇보다 주체와 타자 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고 재설정해야 한다. 좀비학은 인간학의 안티테제로서 인간학과 긴밀하게 연관되며, 특히 주체성 변화의 도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며 전개된다. 좀비학은 오늘날 인간을 둘러싼 여러 담론들과 인간에게 부여된 지위가 전혀 자명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인간학이 형성된 역사와 배경을 추적하고 인간학을 해체하고자 한다. 좀비학은 인간이 만든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구도에 문제를 제기하며, 우리 시대에 가장 근원적이며 ‘혐오스러운’ 타자(좀비)를 사유의 중심에 두고, 인간학을 그 토대부터 전복하려는 사유 양식이자 태도다. 좀비학은 ‘존재론적 전회’를 통해 좀비가 인간뿐 아니라 다른 존재자들과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좀비학은 인간을 정체성이나 유사성에 기반한 위계로부터 구해내며, 가장 먼 타자 모두와 함께 공존하는 존재로서 구성하고자 한다. 좀비학은 파국으로 치닫는 현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좀비학은 인간이 해체된 자리에서 출발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사유와 발견들을 자원으로 활용한다. 좀비학은 현재의 지배적인 담론, 억압적인 권력, 파국적인 세계에 대항하는 긍정의 존재론, 정치적인 주체, 제도적 배치들을 창안하며, 궁극적으로 지금과는 다른 삶과 세계를 발명하려는 집요하고 줄기찬 노력이며 결말이 열린 운동이다. 부두교좀비의 탄생은 데카르트의 근대철학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최초의 좀비 탄생이 근대철학과 제국주의의 결합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중세 신본주의 세계관의 급격한 붕괴 속에서 데카르트는 새 시대를 위한 철학을 마련하려 했다.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인간은 유일하고 우월한 이성적 존재, 생각하는 명석 판명한 주체로 여겨진다. 이제 유럽인은 선험적이며 확고부동한 주체, 보편적이고 균질한 주체로서 세계의 중심에 자리 잡는다. 반면에 여기에서 벗어나는 이질적인 존재들은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하는 비인간이 된다. 이런 주체 중심적 관념은 역사철학과 결합하여 제국주의 지배의 정당성을 설파하고, 다른 인종을 착취하고 죽이는 데 정당성을 제공한다. 데카르트는 인간만이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동물은 영혼이 없는 ‘자동인형’이라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피식민지의 주민 역시 자동인형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들을 채찍질하고 죽인다 해도 인간은 아무런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으며, 이들이 내는 신음은 그저 기계의 삐걱거림처럼 기능상의 이상을 알려주는 신호일 뿐이다. 저자는 다양한 문헌과 영화들을 분석하여, ‘부두교좀비’가 백인이 자신을 보편적인 주체로 정립하면서 배제한 바깥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0세기 초까지 서구 문화는 피식민지 노예를 끔찍하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은 무기력한 비인간, 부두교좀비라는 인간 이하의 타자로 상상했다. 이들은 자신의 처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가련한 비생명들로, 원래 있어야 할 곳(집, 무덤)에서 이탈되어 부당하고 과도한 노동에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노예다. 이들은 주술사에게 조종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며, 백인의 지배나 인도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비주체로만 존재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식인좀비는 안티-휴머니즘의 반근대적 괴물이다 근대철학의 가장 강력한 적대자인 니체는 ‘신’의 절대성에 근거한 인간 개념의 해체를 위해 ‘신의 죽음’을 선언했으며, 뒤를 이어 푸코는 ‘인간의 죽음’을 선언했다. 푸코에 따르면 ‘인간’ 개념은 발명된 지 수백 년에 지나지 않은 담론적 구성물이며, 모래사장에 그려진 그림과도 같아 이내 사라질 위태로운 형상에 불과하다. 저자는 구성된 담론이자 관습적 의미에서의 근대적 인간 주체는 이제 종말을 맞이했으며, ‘식인좀비’야 말로 반근대적 괴물이라고 주장한다. 로메로 감독은 인간의 죽음과 휴머니즘의 종말을 온몸으로 표상하는 괴물 식인좀비를 탄생시켰다. 로메로의 영화에서 식인좀비는 부모와 가족을 살해하며 닳아빠진 근대적 가치체계에 징벌을 내린다. 근대적 주체는 영혼과 육체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영혼에 특권을 부여한다. 반면 좀비는 영혼 없는 육체로서 등장하여, 육체가 내리는 정언명령인 배고픔에 굴복하여 타인을 살해하고, 그 육체를 먹는다는 점에서 철저히 반근대적이며 반휴머니즘적이다. 좀비는 근대적 인간 주체가 지녔다고 가정되며, 다른 존재와 변별되는 특성으로 여겨지는 가치들(인간으로서의 존엄, 이성, 윤리 의식)을 철저히 배반하고 짓밟는다. 이 책은 근대적 인간 개념과 휴머니즘의 폭력을 비판하지만, 동시에 허무주의적 안티-휴머니즘으로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체를 최후까지 제거해 버리면, 어떠한 변화를 위한 행위 주체 역시 상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의 퇴행적 반복, 몰락의 항구적 지속만을 남길 뿐이다. 저자는 인간과 휴머니즘의 죽음 선언이 인간의 본질이나 존재 근거, 혹은 도덕과 윤리를 사라지게 하려는 허무주의나 반-사회적 기획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상실이나 부정적 함의로 축소되지 않으며 오히려 긍정과 생성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현대철학의 출발점이다. 뛰는좀비는 우리 시대의 위기와 모순을 폭로하는 기표다 뛰는좀비영화에서 출몰하는 좀비는 가공할 파괴력으로 순식간에 세계 전체를 유린한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며 서로 죽고 죽이다가 결국 절멸에 이른다. 인간들이 아무리 높은 장벽을 세우고 안전지대를 마련하더라도 좀비는 끝내 그것을 돌파하고 인류를 파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