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고,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절망과 고독을 감싸주는 기억에 대한 9편의 이야기
2016 이효석문학상 수상작 「산책자의 행복」 수록
신동엽문학상(2013), 젊은작가상(2014), 이효석문학상(2016)을 연달아 수상하며 문단의 믿음직한 작가로 자리매김한 작가 조해진의 세번째 소설집 『빛의 호위』가 출간되었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발표한 작품을 묶은 이번 소설집에는 “소외와 불안의 문제를 개인의 삶을 통해 포착”하며, “이 시대에 호응할 수 있는 문학적 상상력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환기한 작품”(심사평)이라는 호평을 받은 이효석문학상 수상작 「산책자의 행복」을 비롯한 9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특히 이번 소설집에서는 조해진이 오랫동안 천착해왔을 뿐 아니라 세월호시대를 살아가며 더욱 견결해진 주제인 “역사적 폭력이 개인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한기욱, 해설) 하는 지점을 한층 섬세하고 차분하게 파고든 점이 돋보인다. 작가는 절망과 고독을 감싸주는 기억들을 이야기하며, “사라졌으므로 부재하지만 기억하기에 현존하”(「사물과의 작별」 69면)기 때문에 “생존자는 희생자를 기억해야 한다”(「빛의 호위」 16면)는 절실함으로 단어 하나에도 진심을 담아 눌러 썼다. 조해진이 보듬어 전달하는 ‘빛의 호위’로,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기억해야 하지만 어둠속에 숨어 있던 진실들에도 따뜻한 온기가 전해질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장롱 뒤나 책상 서랍 속, 아니면 빈 병 속처럼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얄팍하게 접혀 있던 빛 무더기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일제히 퍼져나와 피사체를 감싸주는 그 짧은 순간에 대해서라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다른 세계를 잠시 다녀오는 것 같은 그 황홀함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권은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악기상점의 쇼윈도우에 반사되는 햇빛이 오직 그녀만을 비추고 있었다.(「빛의 호위」 32면)
실제로 유실물에는 저마다 흔적이 있고, 그 흔적은 어떤 이야기로 들어가는 통로처럼 나를 유혹할 때가 많다. (…) 엄밀히 말하면 그 이야기는 유실물을 사용한 누군가의 손때로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 누군가를 잃어버린 유실물은 선반의 고정된 자리에서 과거의 왕국을 홀로 지켜가는 것이다. 간혹 유실물에서 빛이 날 때가 있다. 일년 육개월이라는 보관기간을 채우고도 찾아오는 이가 없어 처리되기 직전, 홀연히 나타났다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빛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한 개인에게 귀속되지 못하고 망각 속으로 침몰해야 하는 유실물이 세상에 보내오는 마지막 조난신호를 본 것 같은 상념에 빠져들곤 했다. 일종의 상실감이었다.(「사물과의 작별」 69면)
“사는 게 원래 이토록 무서운 거니, 메이린?”
또하나 주목할 점은 이번 소설집에서 조해진이 말하는 ‘살아 있음’에 대한 감각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를 살게 하기 위해 고투하면서 그 힘으로 살아가는데, 그 상대는 아주 가까운 사람이기도 하지만 상관없는 이국의 누군가가 되기도 한다. 세상을 떠난 언니가 동생을 살아가게도 하며(「잘 가, 언니」), 어린 시절 친구에게 선물한 카메라가 그를 세상 밖으로 이끌기도 하고(「빛의 호위」), 신문에 실린 사진 한장이 “먼 나라의 화가에게 작품을 완성하도록 부추기는 영감을 주”(「시간의 거절」 181면)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를 살리는 절실함은 「산책자의 행복」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철학과 강사였지만 학과 통폐합으로 직장을 잃고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가는 홍미영(라오슈)에게 답장이 없는 편지를 계속 보내는 중국인 제자 메이린은 “살아 있는 동안엔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127면)라는 라오슈의 말을 되새기며 살아가고 라오슈는 현실에 괴로워하면서 마음속으로만 답장을 보내지만, 둘 사이의 믿음은 분명 서로를 살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
살고 싶어.
목적 없이 뻗어 있는 길 한가운데서 그녀는 속삭였다. 미치도록……
미치도록 살고 싶어.
메이린, 부르며 그녀는 흐느꼈다.
(…)
저는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고,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다예요, 라오슈……(「산책자의 행복」 140~142면)
『빛의 호위』에서 조해진은 “나와 나의 세계를 넘어선 인물들”과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소통”하고 “유대를 맺”(‘작가의 말’ 267면)으며 타인의 생애에 따뜻한 빛을 드리운다. 조해진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우리의 삶에는 ‘빛의 호위’를 받는 순간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는 걸 언제까지고 기억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그 순간들이 “내일을 꿈꿀 수 있게 하는 빛”(「빛의 호위」 23면)이 되어주고,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한기욱, 해설) 할 것임을 믿는다. 그날에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산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야기도 한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생애에는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 표현되는 순간보다 훨씬 더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야기 너머로 뻗어가는 지평에 수많은 문장과 생각과 감정이 흩어졌다가 모이며 또하나의 작은 길이 되어가는 상상은, 언제나 두려울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
이제야 나는,
진짜 타인에 대해 쓸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작가의 말’ 266~26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