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미국의 인문지리학자 에드워드 W. 소자는 그의 책 <포스트모던 지리학>에서 이라는 장에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공간적 전회 해부”라는 소제목을 붙여 공간적 전회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다루었다. 소자는 당시 유행하던 역사 유물론의 역사서술을 비판하였으며, 프랑스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가 그의 대작 <공간의 생산>(1974)에서 처음으로 공간의 망각이라는 서구의 극단적 사고를 극복하여 공간을 새롭게 평가했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원래 전회라는 말이 뜻한 바는 토머스 쿤 식의 패러다임 전환이 아니었다. 소자가 현재 이 개념과 결부되어 있다고 보고 싶어 하는 획기적인 범학문적 전환은 더더욱 아니었다. 소자는 자신의 조어가 일으킨 반향에 고무되어 어느덧 공간적 전회를 낮은 층위에 존재하는 소란스런 담론 유행에서 외롭게 솟아오른 일종의 본원적 전회(master turn)로 이해하고 있다
공간적 전회 개념에 패러다임의 무게가 뚜렷이 실린 것은 1996년의 <포스트모던 지리학>의 후속으로 발간된 에드워드 소자의 <제3의 공간>의 책 표지 소개문에 실린 다음의 글이다.
“현대의 비판적 연구들은 중대한 공간적 전회를 경험하고 있다. 20세기 말의 가장 중요한 지성적, 정치적 발전의 하나로 볼 수 있는 흐름에서 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시간과 역사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관계와 사회에 쏟았을 때와 똑같은 비판적 통찰력과 무게감을 가지고 공간과 인간 생활의 공간성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두 가지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첫 번째 목표로, 1부에서는 개별 학문들이 공간적 전회에 대해 고유의 관점을 피력할 수 있는 공동의 토론장을 제공하였다. 이를 위해 문화학적 문학이론 및 영화학, 역사학, 사회학, 매체학, 철학 분야의 논문들을 모아 놓았다. 두 번째 목표는 인문지리학이 그 본질상 반드시 필요한 범학문적 공간적 전회 논의에 처음으로 적절하게 참여하는 데 있다. 그래서 2부에서는 공간적 전회를 둘러싼 이런 지리학 내부의 논의를 적절히 반영하도록 독자적인 토론장을 할애했다.
궁극적으로 공간적 전회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그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게 이 책의 목표이다. 그런데 이 개념과 결부된 타당성의 요구들 그리고 개념의 범위에 대한 사고들은 서로 큰 차이를 보인다. 거대 패러다임으로서의 본원적 전회를 의미하는가 하면 출발 개념, 발견적 기준, 어느 정도 단기적인 “시각의 전환”(카를 하인츠 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 각기 다른 개념 유형들은 각각의 연구 주제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고 본서에서 그 영향이 무엇인지 밝혀진다.
나아가 이 책의 개념의 범위로, 지형학적 측면은 주로 문학이론과 문화학의 논의들이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위상학적 공간 개념 및 공간 서술의 정립은 철학 쪽에서 특히 수학과 현상학의 개념 전통에 주목하면서 요구하고 있다. 만약 본서에 수록된 각 학문 특유의 공간적 전회 논의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공간의 소멸” 또는 “지리학의 종말”이라는 표현에 대한 의구심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공간적 전회는 1980년대 말부터 주로 포스트모던 매체이론에서 확산된 위의 주장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오래전에 제기된 공간소멸 명제의 이 최신 유형에 대한 비판적 자세가 학제적인 공간적 전회 담론의 특징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공간적 전회의 옹호자들에게 이런 학제적인 공간적 전회의 시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간 무지를 바로잡는 필수적인 교정 장치이지만, 그 비판자들에게는 어느덧 과잉 교정으로 인식되고 있다.
[출판사 서평]
‘전회’하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우리가 가장 쉽게 떠올리는 단어는 바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일 것이다. 이 책의 제목 <공간적 전회>는 이런 코페르니쿠스의 이미지와도 부합하기 때문에 공간‘의’ 전회가 아니라 공간‘적’ 전회라고 번역된 듯하다. 전회라는 말의 무게와 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 <공간적 전회>는 일종의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존재론적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또한 ‘전환(轉換)’이 아니라 ‘전회(轉回)’라는 번역어가 강조하는 것은, ‘공간적 전회’라는 말에 단순히 ‘바꿈’의 의미가 아니라 ‘되돌아옴’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 아닌가 한다. 본문에서도 공간적 전회는 현대의 포스트모던적 경향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고, 현대에 들어 시간에 비해 경시되어 왔던 공간의 위상 회복임을 언급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현대성의 주된 철학적 담론에 가려진 공간의 의미를, 과거의 공간의 의미를 극복한 더욱 발전적인 형태로 재해석해 내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에 등장하는 굵직한 사상가들의 이름만 들어 보더라도 이 책이 가져다주는 존재론적 함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간적 전회 담론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에드워드 W. 소자와 앙리 르페브르는 다소 생소하더라도, 데카르트, 칸트, 헤겔, 베르그송, 후설, 하이데거, 들뢰즈와 같은 귀에 익은 쟁쟁한 사상가들의 이름들이 등장한다. 비록 제한된 분량의 논문집이지만, 공간적 전회라는 하나의 일관된 주제를 중심으로 매우 긴밀하게 통일된 지형을 형성하며, 공간 담론과 관련된 지리학, 사회과학, 매체철학, 문화학, 영화학 등등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구체적이고 풍부한 논의들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각 논문들이 다루고 있는 위의 사상가들의 핵심적인 존재론적 함의와 공간 담론과의 긴밀한 연관성은 그 깊이와 풍부한 의의를 결코 놓치지 않고 있다.
번역에 있어서도, 역자는 거의 문제 삼을 부분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세밀하게, 높은 완성도의 원고를 완성해 주셨다. 이 정도의 깊이 있고, 난이도 높은 내용을 우리말 번역으로 온전하게 옮기기까지 역자의 노고가 얼마나 컸을지를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는 방대한 분량의 참고문헌과 인명 및 개념 색인이 수록되어 있어, 공간 담론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이 보다 진전된 연구를 수행하는 데에 매우 유용한 선행연구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인간 인식의 1차적인 출발점인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두 범주가 바로 공간과 시간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공간적 전회>라는 책은 제목만으로도 그 철학적 무게감을 전해 준다. <공간적 전회>는 철학사 상의 유구한 시간성에 대한 고찰에 가려진 공간성의 범주가 가진 중요성을 풍부하게 다룬 번역서 가운데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초이지 않을까 한다. 이제 <공간적 전회>의 출간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매체철학계에 강한 자극이 되어 이에 힘입은 더욱 다양한 공간 담론이 활발하게 형성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동양에서도 전통 천문학과 풍수지리학, 의 위상학적 체계, 음양오행(陰陽五行)적 체계,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론적 체계와 같은 고유의 풍부한 공간 담론들이 이어 왔으므로, 이러한 전통들이 서구의 공간 담론과 생산적으로 결합하여 앞으로 더욱 풍부하고 주체적인 학문적 결실들을 맺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