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실무적 잠언
숨은 디자인 고전을 발굴해 소개하는 ‘ag 클래식’ 네 번째 책
이 책 『에릭 길: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에세이(An Essay on Typography)』는 1931년 첫 출간과 함께 ‘다시 나오기 어려운 최고의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에릭 길이 전성기에 써낸 이 책은 독선적으로 호언하고 늘 인문적이었던 길의 생각을 보여준다. 길은 이 책에서 모양과 정렬, 기능 등 글자뿐 아니라 산업사회에서 인간의 역할에 관해 선언적으로 진술한다. 이는 산업주의와 수공예라는 두 세계를 묘사하고, 한계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글자에 관한 길의 생각은 오늘날까지 유효하다. 1931년 이 책이 출간되고, 30여 년 동안 글자 기술은 엄청나게 바뀌었다. 하지만 길의 작업을 비롯해 글자는 1931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양끝을 맞추지 않은 글줄과 좁은 글자사이 공간, 띄어쓰기, 넓은 글줄사이 공간 등 오늘날 널리 쓰이는 방법이 이미 등장한다. 이뿐 아니라 실무적이면서 논쟁적인 모습, 노동과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 과정만큼 결과에 집착한 인간 길의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책은 길이 평생 몰두한 글자 실무를 다룬다. 이 이유만으로 독자가 관심을 둘 가치가 있다.
이 책은 길의 진수를 담은 책으로, 길의 이상주의와 실용주의, 일상 작업에 관한 기독교적 시각을 보여준다. 실무적 조언 사이사이는 윤리적 교훈과 격언으로 채워진다. 두 평행선은 단조롭거나 장식적인 글자 속으로 빠져들고, 기독교식 결혼과 잉크 이야기에서 평범과 고통의 미덕을 향한 찬사로 이어진다. 디자이너는 “셀 수 없이 많은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위해 살아야 하듯 길은 상업 활동을 겨냥한 비판을 자제하지 않고, 이따금 불공평한 진술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덕에 독자는 타이포그래피뿐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길에게 다가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