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위문학의 신화
‘일본의 카프카’ 아베 고보의 대표작
요동치는 소설이다. 놀랍도록 선명한 영상 속에서 현실 속 미궁은 깊어만 간다.
_미시마 유키오
『불타버린 지도』는 아쿠타가와상, 프랑스 최우수 외국문학상 등을 석권하며 20세기 전위문학의 신화가 된 작가 아베 고보의 대표작이다. 『모래의 여자』 『타인의 얼굴』과 함께 이 소설로‘아베 고보 실종 3부작’이 완성되었으며, 세 작품 모두 영화화되어 각종 상을 휩쓸었다. 오에 겐자부로와 미시마 유키오가 극찬하고, 마르케스가 주목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예술적 원류로 꼽은 작가 아베 고보. 그의 소설을 통해 미래가 없는 인간이 마주한 세계를 직시하고 그 돌파구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 망명자가 그리는
소멸과 재생의 미학
어느 외진 흥신소에 사라진 남편을 찾아달라며 한 부인이 의뢰서를 보내온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하던 남편이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 주인공인 탐정 ‘나’는 의뢰인을 찾아가지만 한시가 급해야 할 부인과 의뢰인의 남동생, 실종된 남자의 직장 후배는 수사에 열의를 보이지 않고 나를 음흉하게 따돌릴 뿐이다. 수사는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진다.
아베 고보는 영화적 기법을 소설에 반영하여 독특한 작풍을 구사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소설 도입부에 묘사된 커브길은 결말에서 반복되고, 이 반복은 새로운 이야기의 전개를 암시한다. 이처럼 『불타버린 지도』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영상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먼저 소설 전반부는 추리소설의 형태를 띠며 묘사 하나하나가 사실적이다. 탐정은 의뢰인이 풀지 못한 사건의 단서들을 하나씩 꿰어 사건을 해결하는 주체이다. 크고 작은 사건의 파편들이 탐정의 눈과 손을 거치면서 사건은 전후 관계를 갖추기 시작한다. 탐정은 사건을 이해하는 중심의 위치에 서면서 의뢰인이 보지 못한 현실의 이면을 본다.
후반부는 자명하다고 믿어온 단서들이 흔들리면서 환상소설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탐정은 자신이 찾아낸 단서들을 하나둘 잃고 오히려 의뢰인과 증인들에게 관찰당하게 된다. 수사 자체도 의뢰인이 실종자를 진실로 찾고 싶은지 저의부터 파악해야 하는 형국에 놓인다. 소설은 마침내 명확한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없고 추리가 일체 불가능한 분열된 세계로 빠지고, 그 가운데 누구도 찾지 않던 실종자들이 낯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나아가야 하는 길을 가리는 커브처럼 소설의 말미에서 작가는 사건의 사각지대를 가리키며 도입부를 불러낸다. 세계는 처음보다 더 낯설어졌지만, 다른 관점을 열어보임으로써 모든 수사는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허구와 진실을 넘나드는 구성으로
인간 실존의 문제를 파고든 탁월한 실험작
아베 고보가 작품을 집필하던 당시 일본은 1964년 도쿄 올림픽, 1970년 오사카 세계박람회를 거치며 경제성장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도시는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이들로 나날이 인구가 불어났고, 타자와의 소통 부재와 인간 소외가 문제로 떠올랐으며, 실제 곳곳에서 실종 신고가 속출하였다.
그런 점에서 작품 첫머리와 말미에 묘사된 아파트 단지는 개체가 매몰되어버린 몰개성적이고 획일화된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작중인물들 역시 자기만 정신을 차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한순간에 삶의 무게중심을 놓치고 만다.
아베 고보는 허구와 진실을 넘나드는 소설 속 구성을 통해 합리성의 세계 일반을 낯설게 만든다. 이를 통해 독자는, 인간이란 처음부터 불확실한 지도 안에 존재해온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작가는 일상을 견고하게 지탱하던 지반들이 하나둘 상실되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존재 일반의 의의를 캐묻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전위문학의 신화 아베 고보
아베 고보는 큰 틀의 가공성과 세부의 리얼리티가 결합된 작품을 그린 작가로 유명하다. 평생 모래를 파내야 하는 마을과 그곳에 휘말려든 여행객을 그린 <모래의 여자>, 사고로 얼굴을 잃은 남자가 플라스틱으로 얼굴을 만들어 새로운 삶을 사는 등 그의 전작들에서 안정된 직업으로 평화롭게 일상을 일구는 등장인물들은 어느 날 현실의 신분을 잃고 사물로 변하거나 미로 같은 허구적 세계에 갇힌다.
이러한 작품의 경향은 작가가 만주사변 후 중국 동북지방에 세워진 만주국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내고, 일본의 패전과 함께 무정부 사회가 된 고향을 전전한 경험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회의 기준이 철저하게 무너지는 것을 목격해온 셈입니다. 일상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정부가 없고 경찰이 없었죠. 그렇게 되면, 사람은 누구나 세계관이 좀 변할 겁니다. 정글에 유기된 어린아이와도 같았죠. 그때 생각했죠. 사람이 이렇게도 살 수 있다는 것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작가 대담 중에서
“밖에서는 전쟁이라는 혐오스런 놈이 발소리를 죽이며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사람들은 자기 집만 소중하다 여기며 문을 굳게 닫아 건 채 집안에만 들어오지 않으면 된다는 듯 보고도 못 본 척하죠. 전쟁이란 놈은 이런 민중의 무관심을 아주 좋아해서 기회만 있으면 강도로 돌변하여 일상의 문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작가 회고록 중에서
전쟁의 패망과 함께 정권이 무너져도 시민적 일상은 계속되었다. 전쟁으로 대표되던 폭력이 일상에 도둑처럼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을 때 작가의 감각은 이를 남달리 포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베 고보는 기존 리얼리즘 소설이 현실을 정밀하게 묘사하고도 끝내 보여주지 못한 지점, 실재 너머의 세계를 그리며 돌파해나갔다. 작가는 인간에게 미래나 희망 따위는 없을지라도 절망 속에서도 계속해서 통로를 파내려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작가의 세계관이 선명히 드러난 작품이 바로 <불타버린 지도>이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낯선 사물이 예술로 승화된 세계를 경험하게 될 뿐 아니라, 지도가 가리키는 ‘닫힌 무한’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