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은 갔는데, 왜 새것은 오지 않는가?
질문이 틀렸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아직 저물지 않았다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시대,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문구를 빌려 현대를 진단한 이 명제는 많은 지식인의 공감을 샀다. 주지하다시피 ‘낡은 것’은 신자유주의로, 1970년대부터 전 세계를 지배해 온 이 체제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에 여러 식자들은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대체 왜 새것은 오지 않는가?
기실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라는 말은 ‘신자유주의’라는 말만큼이나 상투적인 것이 되었다. 2008년 9월 19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서브프라임 모기지에서 비롯한 금융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전례 없는 조치’를 시행하겠다고 공언한다. 무한 공적자금 투입, 전방위 시장 개입을 통해 월스트리트의 붕괴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 조처를 두고 수많은 지식인은 ‘신자유주의 종주국’이라 할 법한 미국이 ‘작은 정부 큰 시장’을 포기했다며 신자유주의에 종언을 고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신자유주의는 또 한 번의 큰 위기를 맞는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글로벌 경제에 제동을 건 것이다. 셧다운과 국경 폐쇄가 이루어졌고, 거의 모든 나라의 정부가 위기를 모면하고자 천문학적인 공적 자금을 투입했다. 또다시 신자유주의 종말론이 고개를 들었고, 너도나도 ‘포스트 신자유주의’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과연 신자유주의는 끝났는가? 그렇다면 왜 새것은 오지 않는가? 새것이 오지 않는 이유가 낡은 것이 아직 저물지 않았기 때문이라면? 『내전, 대중 혐오, 법치』는 파리 낭테르대학에 거점을 둔 네 명의 석학이 함께 쓴 책으로, 저자들은 여전히 세계가 신자유주의의 지배 아래 있다고 주장하며 그 지배 방식에 주목한다. 푸코의 통치성 관점에서 이 체제가 취하는 전략적 특성에 초점을 맞출 것을 제안하는 저자들은 신자유주의를 단순한 경제·정치 사상으로 여기는 관점에서 벗어나 “모든 종류의 평등 요구를 무력화하려는 기획”으로 바라본다. 이 명제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아직 저물지 않았다.
내전, 대중 혐오, 법치, 세 키워드로 꿰뚫는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진화
저자 가운데 피에르 다르도와 크리스티앙 라발은 『새로운 세계합리성』(오르트망 옮김, 그린비)에서 신자유주의가 걸어온 궤적과 그 주창자들의 이론을 분석한 바 있다. 『내전, 대중 혐오, 법치』에서도 다른 두 명의 저자들과 함께 이 방법론을 채택해 신자유주의가 태동한 1938년 월터 리프먼 학술대회부터 오늘날까지, 사상사적 계보를 따라 이 체제에 내재한 특성을 밝혀낸다.
저자들이 제기하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전략이자 특성은 ‘내전’으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군사적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벌이는 내전을 “연합한 과두지배자들이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라고 정의한 저자들은 칠레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부터 시작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기수였던 대처와 레이건 집권기(다시 말해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강조한 사회민주주의 좌파가 실각하고 패퇴한 시기)를 거쳐 세계 곳곳에서 극우 세력이 부상한 지금 이 순간까지, 역사적 사건들을 면밀히 살피며 신자유주의가 벌이는 ‘내전’을 분석해 나간다. 내전에는 필연적으로 ‘내부의 적’이 상정되어야 하는데, 역사적으로 ‘공산주의’ 혹은 ‘집산주의’가 적으로 지목되었고, 오늘날에는 인종주의 또는 보수주의와 결합해 새로운 적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게 복지 정책, 노동조합 등 ‘평등’을 추구하는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의 적으로 상정되었으며 오직 시장 질서와 경쟁만이 옳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 체제의 고유한 주요 속성 하나가 드러난다. 내부의 적을 분쇄하기 위해 ‘법을 이용한 지배’, 즉 법치를 내세운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의 법에 대한 선호는 반대파를 향한 폭력으로도 드러난다. 오늘날 지배 세력은―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반대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경찰력과 사법 당국을 이용한다. 2018년 프랑스 정부의 ‘노란 조끼 운동’에 대한 탄압을 예로 들 수 있다. 오늘날 국가는 ‘안전’을 이유로 반대 세력을 억압할 법을 제정하고, 집행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들은 신자유주의의 대중 혐오, 즉 반민주주의적 면모에 주목한다. 미제스는 “대중은 사유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인류를 지도하는 일은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라고 이야기했고, 하이에크는 민주주의를 ‘사적 권리에 대한 침해’로 간주했다. 이들을 비롯한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은 정도나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인민주권’을 부정하며 인민의 권력을 제한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인민(대중)은 만족을 얻을수록 평등의 이름으로 더 많은 요구를 내세우기 때문에, 그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때로는 독재를 이용해서라도) 이를 막아야 한다는 게 신자유주의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결국, 신자유주의가 벌이는 내전은 ‘자유’를 앞세워 모든 ‘평등’ 요구에 대항해 벌이는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다시 신자유주의의 계보를 톺는 것에 관하여
어느 세력이든 자기편만 극단적으로 챙기는 모습, 반대 세력에 대한 철저한 무시 혹은 탄압,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로 미끄러져 버린 법치주의, 갈라치기, 갈등, 분열, 혐오…. 눈 밝은 독자라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이자, 저자들이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핵심으로 제시하는 세 키워드가 오늘날 우리 사회와 묘하게 포개어지는 지점을 포착해냈을 것이다.
다만 『내전, 대중 혐오, 법치』로 표면적인 정치 상황을 읽어내는 데 그친다면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들은 신자유주의의 계보와 역사적 사건을 샅샅이 분석하여 이 사상이 경제·정치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문화에까지 걸친 전 지구적 질서가 된 과정을 추적한다.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법과 노동을 재조직해 새로운 노동 규범을 강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해방 혹은 자기실현이라는 매력적인 말로 포장하여 수용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데까지 나아”가는지, “여성의 권리를 문제 삼고, 동성 결혼을 반대하도록 대중을 선동”하는 ‘도덕적 십자군’의 형태를 취하는지,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기업가 정신 즉 ‘자기 경영자’ 모델을 내면화하도록 하는지, “어떻게 대립의 경계를 이동시켜 인구의 일부가 권위주의를 지지하게 만드는지” 낱낱이 드러낸다.
이 분석을 따른다면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경향이나 소수자를 향한 소위 ‘역차별’ 논란, 약자 혐오, ‘갓생’으로 표상되는 과도한 자기계발 담론, 극명하게 양분되는 정치 등은 모두 신자유주의의 변형 혹은 발현이다.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가 한국 사회에 전면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사건은 IMF 외환위기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다시 그 계보를 근본에서부터 통찰한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체현한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는 귀중한 렌즈가 될 수 있다.
모든 대안을 봉쇄한 것으로 보이는 이 폭력적인 체제에 맞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전 지구적 질서가 될 수 있었을까? 우파는 물론 좌파 역시 신자유주의 통치 전략을 적극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좌파 버전으로 선택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문화적, 도덕적 대의를 추구하기 위해서 사회 평등을 쟁취하기 위한 역사적 투쟁을 외면해왔”으며, “신자유주의가 집권하고, 사회를 변형시키는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자리 잡는 데 성공한 것은 우파의 반동적 버전과 좌파의 현대주의적 버전으로 이중화된 덕분에 가능했다”라는 저자들의 지적은 뼈아프다. 이러한 두 분파의 가치 전쟁 속에서 대중은 분열하고, 모든 대안은 가로막힌다. 신자유주의의 내전 전략은 ‘분할하여 통치하라(Divide and Rule)’라는 격언을 충실히 수행하는 셈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이항 대립에
siwon.hage
3.5
책은 두 가지로 나뉜다.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인 책과 그 나머지. 이 서적은 전자에 속하는데, 그것도 전문용어들을 어느 정도 숙지하고 의미까지 기본적으로 이해된 상태를 요구한다. 외국 사례를 들고 있지만 사실 잘 이해하진 못하겠고, 대한민국이 참 다행이다 싶은 게 어지러운 시절 군사독재가 자연스럽게 문민정부로 이어져내려온 것. 그게 아니었다면 쿠데타가 일상인 나라가 되었을 것이고 평생 개발도상국에 머물러있었을 것이다. 정치가 문제가 아니라 정치인들이 문제다. 그리고 그것들을 숭배하는 눈이 먼 사람들과 한 세트이다. 다들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숭배와 증오의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프리 패스권을 안겨준다. 가장 효율적이고 쉽게 표를 구하는 일인데 왜 굳이 어려운 일을 마다하나. 우리가 정치를 이야기할 때 이 기본 배경을 기본으로 깔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된다. 신자유주의니 사회주의니 권위주의 독재, 자유방임이니 하는 것들은 솔직히 크게 와닿지 못한다. 숭배의 대상인데 무슨 놈의 정치인가. 그냥 권력 지향 정치인만 있고 그걸 숭배하는 무리가 전부인데 멀 그렇게 어렵게 이야기하는가.
왓챠정리몬함
4.0
신자유주의적 좌파(한국으로 따지면 민주당)의 방식이 여기서드는 외국 사례들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거기는 물화된 다양성 정치라도 하는데 한국 민주당에서는 이해조차 없다는 점에서) 실질적 신자유주의 길을 택하면서 앨리트들 간의 적대적 공생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시민사회와 분리했다는 지점에서는... 깊게 들여다봐야할 책이다. 특히 장하성류 일파가 신자유주의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고 호도한다는 점에서.
계란말2
4.5
5명의 저자가 공저한 본서는 제목에서 밝히듯이 세 방향으로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동시대의 풍경과 그것의 뿌리를 추적한다. 우선 푸코가 지적하듯 자유주의는 하나의 자유주의가 아닌 상호적으로 응집되지는 않은 프로젝트로부터 발전했듯이, 신자유주의 또한 상이한 이론가들의 국가권력의 도움을 받아 운영한 전세계 각처의 실험실로부터 얻어낸 모순적인 결과값들의 복합적인 조합으로 이어진다. 이를테면 제작년에 사망한 키신저에 대한 Jacobin 지의 특집 기사들은 그가 70년대에 CIA를 주축으로 전세계 각처에서 수행한 특수작전들을 통해 어떻게 신자유주의 질서를 강제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는지 상세하게 다루는데 이를 읽어보면 그 수법들 모두가 다양하며 서사하라, 키프로스, 동티모르 같은 약소국들을 그 실험 대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대상 중 가장 유명한 국가는 아마 칠레일텐데, 이 사례에서 보듯 신자유주의는 "각국의 조건에 대한 고려 없이 적용 가능한" 만능 열쇠가 아닌 그 특수성을 고려하여 실험해야 했다(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 일반과 오늘날 대한민국을 분석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다만 저자들이 가장 핵심적으로 다루는 서구의 사례들을 통해 트럼프가 귀환한 현시점에서 준비해야할 반격을 강구하는데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은 틀림 없다). 여기에 슈미트에게서 도움을 받은 '강한 국가' 개념은 이러한 모순적인 조합식들을 관통하는 시장을 위해 봉사한다. 슈미트는 개별자 모두의 요구에 휘둘리지 말고 진정한 주권자의 질서에 복속시키는 국가를 지지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주권자의 질서의 자리를 시장에 부여한다. 정치권력은 경제에 개입하지 않고 법률을 준수해야 하며, 시장이 자유롭게 돌아가기 위해 정치 권력이 아닌 사법에 의해 작동하는 법치국가야 말로 진정한 자유를 보장한다. 즉, 그들이 얘기하는 자유는 시장의 자유이며 이를 해치는 위협을 국가가 관리하고 때로는 다수의 이익이 기대되는 상황일지라도 시장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이는 억제될 수 있다. 맑스가 "국경에 따라 짜여진 허구"로서의 국가를 얘기하며 부르주아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국가를 보았다면, 신자유주의자들은 이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민들의 결합인 집산주의와 국가주도의 계획경제 모두 신자유주의가 배척할 대상으로 설정된다. 푸코가 지적했듯 신자유주의는 개인을 자기경영자로 만들어 개인의 자기개발은 실존의 윤리가 된다. 본서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는 저자들의 주장이 한 발 더 나가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아래 자기경영자들이 자신을 적으로 삼을 수 밖에 없도록 강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모든 개인이 자기경영자가 되도록 권장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자립하는데 있어 기반이 될 노동법과 사회복지의 파괴를 촉진하려는 의도에서 나타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주요 메커니즘으로 푸코가 제시한 생명관리정치의 특징인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의 '조절'이 여기에 적합하다고 보인다. 저자들은 이를 프로이트의 초자아(의 억압)과 니체의 부채/죄의식을 연결하는데, 랏차랏토 같은 이가 지적하는 부채통치가 정확히 똑같은 레퍼런스를 공유한다. 여기에 적합한 사례로는 오늘날의 프랜차이즈 가맹점 경영을 거론할 수 있겠는데, 그들은 가맹점주들이 준비한 목돈에 더해 영업지원금이라는 이름으로 무상으로 대출을 받게 해 시작한 사업의 이윤을 받는다. 그러나 모든 사업이 성공할 수도 없는 터인데, 여기에 한 발 더 나가 성공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인 이들까지 사업을 시작하도록 현혹한다. 그렇게 사라진 수많은 프랜차이즈 점포들을 생각해보라. 예수가 사용하던 아람어로 죄와 부채는 같은 말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내가 진 죄/빚은 내가 미래에 감당해야할 무엇이었고 죄인/빚쟁이는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내면화한다. 그렇게 그들의 배경에 놓인 메커니즘은 은폐됨에 따라 계급 간의 적대는 사라지고 그들의 과오만이 남아 서로를 향한 항구적인 내전이 시작된다(다른 논자가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본서는 내전을 수행하는 이들의 위치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쉽지만, 이를 무차별적인 내전을 지칭하는 것이라 생각해볼만하다). 푸코가 연구했던 근대 사회의 등장과 인간의 발명과는 달리 이제 국가는 비정상인들을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통치 대상으로 삼아 각 사회 속에 분산시키고 분열을 조장한다. "개인은 타인을 잠재적인 적으로 여기며 두려워할 뿐 아니라, 극단적으로 대다수가 패자가 되는 게임의 규칙을 따르기 위해 자기 자신의 적이 된다." 그렇게 서로를 혐오가 싹튼다. 그 칼끝은 상대방을 향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한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파괴한 시체들을 동력으로 삼아 진보한다. 이러한 허구는 오늘날 금융화를 떠받들고 있는 부채이며, 언젠가 돌려받아야할 죄악이다. 이를 감추기 위해 완전성의 서사가 준비된다. 사회 문제는 "더 이상 계급 간 불평등과 관련되지 않으며, 사회적 이동과 통합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이며 (혹자는 비전체라고 지칭하는) 통합될 수 없는 전체를 가로막는 것들은 모두 배제의 대상이 된다. (국가 별로 상이한 분야에서 벌어지고는 있지만)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한 풍경이다. 이번 독서에 있어서 만족스러웠던 점은 내전 상태를 위한 법치에 대한 두 관계의 연결이 다소 미흡하게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파의 전략을 승리를 위해 단순히 답습하는 좌파의 패착을 지적하는 다수 대목들에 있다. 좌파는 우파의 언어를 전유하고, 우파는 좌파의 레토릭을 빌려 승리한다. 방법의 강도는 달라도 전 세계 각처에 벌어지는 현실인 것 같다. 예를 들면 머스크가 발표한 DOGE의 정부부처 인사효율 증대를 통한 이익을 전국민 생활지원금으로 지원하겠다는 발표는 기본소득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흥미로운 점은 인사효율 강화를 주장하는 이유가 정부의 빚이 말도 안되게 증대했다는 것에서 출발했는데 이 부채에 대한 언급은 없다!) 진태원이 자신의 논문에서 제시한 것과 같이 포퓰리즘이 오늘날 좌우 막론하고 기본 전략으로 설정된 이 시점에서 머스크는 기본소득/복지국가, 그리고 자동화와 노동의 소멸/좌파 가속주의와 어떤 점에서 차이를 갖는가? 분명 질문에 앞질러 어떻게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됐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선생되어야할 것이다. 앞서 지적한 하나로 귀결되는 신자유주의 일반은 없다는 주장과는 별개로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하는데 곤혹을 겪는 오늘날의 전지구적인 금융화의 독주로 인해 흔한 현상이 되었다.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형태의 지배 아래 권력의 행사라면, 이것을 극대화한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경제적 자유에 수반되는 정치적 자유가 아닌 시장의 지배에 복속되는 절대다수의 사람들과 이를 주도하는 특권층 사이의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를 조장한다. 거대한 반동이 (이미) 시작됐다.
박성준
3.5
신자유주의 특유의 내전성(?)에 쉽사리 동의가 안 된다. 예란 테른보른이 어딘가에서 얘기했듯, 근대성 자체가 내전 아니었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석은 굉장히 공감되는 부분들이 많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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