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글이란 게 내게 짜릿한 매력으로 다가오더니
급기야는 나를 늦깎이 글 쓰는 할매로 마구 몰고 갔다!”
글쓰기로 뭉친 할머니들의 유쾌하고 진솔한 에세이
낯선 타국 시드니에서 글쓰기 하나로 뭉친 일곱 할머니의 유머러스한 에세이집 『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이 출간되었다. 한국을 떠나 시드니에 정착한 지 어느덧 반세기가 되어 간다. 한국어보다는 영어를, 밥과 김치보다는 빵과 치즈에 익숙해져야만 했던 시간을 지나, 내 나라 내 언어를 찾아 글쓰기 방 앞에 선 할머니 저자들을 만나 보자. 동화작가 이마리를 필두로 꾸려진 ‘할머니 독서 모임’은 코로나 봉쇄령으로 외출이 어려웠을 당시 글쓰기 모임 ‘팔색조’로 변모한다. 어른이 된 자녀들이 훌쩍 떠난 집을 돌보던 어느 날, 저자들은 문득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나를, 내 것을 사랑할 시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할머니로 지내느라 들여다볼 겨를이 없었던 ‘나’의 순간을 온전히 만나고 싶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듯 한 글귀가, 한 문장이 우리들의 아픈 상처를 치유한다. 때로는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기도 한다. 글이란 녀석은 비포장도로만큼이나 울퉁불퉁한 우리의 거친 삶을 갈고닦아 준다. 그런 후엔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게 다듬어진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_「바람난 팔색조」 중에서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일곱 할머니가 각자의 개성과 감각으로 그려 낸 일상의 풍경을 담고 있다. 난생처음 눈에 담은 호주의 정경부터 서툰 언어로 친구를 사귀었던 날, 이웃집에 초대받았던 일,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을 준비했던 기억, 가족과 슬픔을 나누고 보듬었던 순간을 다정하고 섬세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누군가에겐 평범하고 투박한 일상이 오랜 세월 이방인으로 살아온 할머니들에겐 더없이 각별한 서사가 된다. 지나온 과거를 현재 시점에서 더듬어 갈 때면 새로이 발견하는 지점도 있다. 당시에는 삶을 뒤흔들었던 일들이 과거 시제로 쓰여 있을 때가 그렇다. 끝이 보이지 않던 긴 터널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 든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애도하고 미워하고 화해했던 경험들이 도리어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할머니 독서 모임’이라는 말에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누군가 제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저는 유쾌하고 귀여운 할머니가 되는 것이라고 답하곤 하거든요. 제게 ‘할머니 독서 모임’이란 말이 주는 느낌은 제가 꿈꾸는 미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_「디어 걸스」 중에서
글쓰기 모임의 이름이기도 한 ‘팔색조’는 일곱 가지 색을 지닌 새이지만, 햇빛 아래에서 관찰하면 또 다른 색을 보여 준다. 긴 시간 공들여 바라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여덟 번째 색깔이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채로운 색깔을 보여 주는 새와 글쓰기를 통해 자기 안의 이야기를 발견해 나가는 일곱 할머니의 모습은 닮은 점이 많다. 시간은 흘러가고 나이는 들어가지만, ‘나’를 발견하는 ‘날’들은 갈수록 늘어난다. 언제나 누군가를 돌보는 자리에 있었던 일곱 할머니는 글쓰기 안에서는 미술가이고, 패셔니스타이며, 독서광, 동화작가, 수놓는 농부, 전직 간호학 교수, 영문학도 언니가 된다. 각자의 자리에서 기나긴 흔적을 남기며 오늘에 도달한 할머니들이 글쓰기마다 마주했던 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삶이 계속되는 한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책의 이름에 ‘데카메론’을 넣은 이유이다. 시간이 흘러도 끊임없이 언급되고 다채롭게 해석되는 이야기. 사람도 마찬가지일 거로 생각한다. 생동하는 것처럼 사랑과 온기로 가득한 에세이를 이번 『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에서 만나 보길 바란다.
손자들이 떠나던 날 젤 나이 어린 손자의 인사가 생각난다. “할머니 쌀랑해요” 하며 조그만 두 주먹을 오므리며 하트 모양을 그렸다. ‘사랑해요’가 국적 불명의 언어로 둔갑한 거다. 나도 두 주먹을 웅크려 하트를 만들어 본다. 그러나 손자들이 떠난 후 내 마음은 썰물처럼 썰렁하다. 그래도 난 애써 웃어 본다. “나도 쌀랑해요” 하면서. _「할머니 쌀랑해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