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이미지로 응결된 백적흑청의 시
시인의 붉은 피와 지중해의 푸른 피가 만나는
미적 체험의 순간들
1997년 《작가세계》로 등단하여 제26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시작 활동을 보여 준 강기원 시인의 네 번재 시집 『지중해의 피』가 출간되었다. 시인은 적색과 청색이 혼재되는 시집 제목처럼 각각의 색이 살아 있되, 서로 길항하고 간섭하여 하나의 시적 세계를 구성하고자 한다. 피의 색(붉은색)이 지닌 죽음에 대한 욕망과 뜨거움, 바다의 색(파란색)이 지닌 생명에 대한 진취와 호방함이 흑색과 백색의 배경과 어우러져 강기원 특유의 미적 세계관을 이룬다.
■ 백(白)과 적(赤)
죄에 물들고 싶은 밤
물컹거리는
무화과를 먹는다
농익은 무화과의
찐득한 살
피 흘리는 살
-「무화과를 먹는 밤」에서
붉은색은 욕망의 색이다. 흰색은 순수의 색이다. 시인에게 욕망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이루어져서도 안 되는 욕망, 즉 죽음에 대한 욕망에 수렴된다. 순수함은 아직 아무런 욕망이 발현되지 않은 세계, 그렇기에 곧 더럽혀지거나 훼손될 가능성이 넘치는 세계이다. 백색의 공책에 적색의 흔적을 남기는 것, 즉 쓰는 행위는 시인에게 있어 죄를 짓는 행위고 조금이라도 죽음의 근사치에 접근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화과를 한입 베어 물고 “피 흘리는 살”이 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얀 공책에 핏자국이 남는 걸 시인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을 욕망한다. 강기원이 보여 주는 백색과 적색의 대비는 ‘글쓰기의 욕망’을 독자에게 환유하는 드라마틱한 도구가 된다.
■ 흑(黑)과 청(靑)
허기의 지도 따라
바닥짐 버리고 여기까지 온
나여
최초의 비린 맛인 저
미노아의 젖멍울에
갈라 터진 입술을 대리
맨발의 푸른 자맥질로
내 피 전부를
지중해의 피로 바꾸리
천둥벌거숭이
크레타의
파랑(波浪), 파랑, 파랑이 되어
-「지중해의 피」에서
검은색은 멜랑콜리의 색이다. 파란색은 동경의 색이다. 시인에게 멜랑콜리는 우울의 다른 이름이며, 심지어 심연 속 깊은 우울이기도 하다. 시인에게 동경은 시적 호방함이 펼쳐지는 자리, 시로서 우울과 애도, 욕망과 자유를 폭발시키려는 불가능한 시도이다. 시적 폭발은 시를 쓰는 자의식의 긍정적 과잉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며 이는 검은색의 세계, 즉 멜랑콜리적 배경에서 비롯된다. “내 피 전부를/ 지중해의 피로 바꾸리”라는 선언은 흰색과 빨간색, 검정색을 거쳐 파란색에 이르기까지의 이미지 변화가 끝에 다다랐다는 시적 선언에 가깝다. 이를 테면 위대한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지중해의 파랑에 대한 동경과, 생명을 부지하게 위해 지중해에 뛰어든 난민의 피에 대한 애도가 동시에 시적 에너지로 발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강기원의 시집 『지중해의 피』에서는 색의 조화, 동경과 애도의 미적 교합이 이뤄진다. 민음의 시 217 『지중해의 피』는 하얀 종이에 검은 글자가 박힌 한 권의 시집이지만, 독자의 밝은 눈 아래에서 각자의 색이 영롱히 빛을 내는 회화 작품으로서 기능할 것이다. 이토록 불가능한 가능성을 꿈꾼 강기원의 시집 『지중해의 피』를 색깔도 없이 혼탁한 세상이 내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