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어느 날 나는 문득 엑상프로방스에 도착했다.
내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프랑스 외무성이 지정해준 곳이었다. 그 도시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던 나는
스물일곱 살이었고 혼자였다.
그날 이후 나의 삶은 프로방스를 향하여 밝고 넓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 고장의 빛과 향기는 내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행복의 충격’이 되었다.
1977년 나는 신혼의 아내와 함께 프로방스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첫딸을 얻었다.
매 순간의 여름빛은 영원한 현재가 되었다.
_서문 「오래된 현재 1969~2012」 중에서
알베르 카뮈, 장 그르니에, 마르셀 프루스트의 연인,
불문학자 김화영의 프랑스 문학기행
이 고장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빛과 그늘의 반점 사이로 미풍처럼 흔들리다가 고이고 고였다가는 흐르는 우리들 저마다의 삶의 순간과 순간이다. 그 위에 내려앉는 짧은 여름빛, 그 덧없음이 바로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아닐까. 나비의 날개처럼 가늘게 떨리는 그 빛 위에 마음을 고즈넉하게 부어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라. 그리고 이 세상에 살아 있음을 기뻐하라. _210쪽, 「뤼르스, 그리고 지오노의 집 ‘르 파라이스’」 중에서
인생에 드리우는 짧은 여름빛…… 글로 적어만 보아도 눈이 부시다. 사랑일 수도 있고 청춘일 수도 있다. 일에 대한 열정이나 어떤 대상에 대한 탐구일 수도 있겠다. 삶에서 가장 빛나던 날들을 채웠던 것들. 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인 김화영 교수에게 인생의 ‘여름’은 프로방스에서 보냈던 이삼십대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1969년 지중해 연안에 처음 발 디딘 젊은 학자가 받은 충격을 담은 책 『행복의 충격』은 백여 권의 저·역서를 낸 그의 첫 책이 되었다. 자유로이 국경을 넘나들고 “지금 당장, 여기서, 행복한 사람”의 땅에서 보낸 젊은 날의 기록이었다.
40여 년이 지났다.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유학생이던 그는 이제 원로 학자가 되었다. 그런 그가 2011~2012년 두 번의 여름, 프로방스를 다시 찾았다. 프로방스에서 파리까지의 여정에는 알베르 카뮈, 장 그르니에, 마르셀 프루스트 등 그가 평생을 바쳐 번역해 소개한 작가들이 함께했다.
“이것은 긴 세월 동안 남프랑스의 여름빛이 숙성시킨 사랑의 묘약 이야기다.
그리고 여행길의 풍경 속에 지워지지 않는 지문을 남긴 문학의 이야기다.”
1974년 ‘청년’ 김화영이 학위논문을 끝내고 찾아갔던 루르마랭, 알베르 카뮈의 무덤 앞에 헌화한 기억이 있는 그곳을 2011년 여름에 다시 찾았다. 알베르 카뮈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현재 그 집에서는 카뮈의 딸 카트린 카뮈 여사가 아버지의 작품을 관리하고 있다. 수십 년간 카뮈의 작품을 번역해온 한국의 학자와 카뮈의 딸은, 카뮈의 옛 집필실을 둘러본다. “카뮈는 이 찬란한 풍경을 앞에 놓고 ‘헐벗음’이 ‘풍요’와 하나가 되는 행복하고 비극적인 인간의 삶을 생각했을 것”이라 말하는 문장 속에는 카뮈와 그의 문학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 그가 머문 곳에서 그를 추억하는 김화영 교수의 남다른 감회가 담겨 있다.
이듬해에는 카뮈가 폐결핵으로 고통받으며 가족과 떨어져 외롭게 요양한 농가 ‘르 파늘리에’를 방문, 그곳에서 구상한 소설 『페스트』와 희곡 『오해』를 되새긴다. 병중에도 스승 장 그르니에와 끊임없이 주고받았던 편지의 내용, 『작가수첩』을 통해 알 수 있는 당시의 심경 등은 ‘르 파늘리에’의 정경 묘사와 함께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눈에 덮인 겨울날 카뮈는 ‘덧문과 창문이 푸른색이라는 것을 내가 알아챈 것은 모든 것이 눈에 덮이고 나서였다’라고 기록한 바 있지만, 70년이 지난 이 화창한 여름날, 다소 준엄해 보이는 회색 돌벽에 뚫린 덧문들은 대낮의 눈부신 빛을 날카롭게 반사하며 그 푸른빛으로 내 눈을 찌른다”고 말하는 김화영 교수의 가슴엔, 카뮈의 문학과 함께한 시간이 아득하게 떠올랐을 것이다.
어느 날 카뮈는 말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그러나 각자에게는 저마다의 죽음. 하여간 그렇기는 해도 역시 태양은 우리의 뼈를 따뜻하게 데워준다.” 그 뼈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동안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 있음을 찬미할 일이다.
_225쪽, 「루시용 붉은 흙을 바라보며 레몽 장을 전송하다」 중에서
말라르메가 기간제 영어 교사로 머물렀던 투르농의 고등학교를 찾아가기도 했다. 명상적인 말라르메의 시 세계와 무관한 시골에서 그가 감당해야 했을 막막함과 알아주는 이 하나 없다는 고독감, 무력감과 권태를 짐작해본다. 교사직이 힘겹게 느껴질수록 마음속으로는 시적 세계를 갈구하고 창조적 고통에 시달렸던 말라르메, “여름에는 관능과 지혜와 음악이 조화를 이룬 전원시 「목신의 오후」가, 겨울에는 얼음처럼 싸늘한 절대의 미인 「에로디아드」가 그를 송두리째 사로잡”았다.
조르주 상드의 고향 노앙 성과 『마의 늪』의 무대가 된 숲, 1층에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세탁소가 있었고 3층에는 아버지의 구두 수선 아틀리에가 있었던 ‘그랑드 거리 14번지’ 장 지오노의 생가, 알랭 푸르니에의 신비로운 러브 스토리 『대장 몬느』의 배경인 에피뇌유 르 플뢰리엘, 발자크가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등 10여 편의 걸작들을 구상, 집필했던 사셰 성,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가운데서도 잊을 수 없는 ‘마들렌’ 이야기를 들려준 콩브레…… 당대의 현실, 그 속에 살던 작가의 삶, 그가 그려낸 작품 세계, 그 삶과 작품을 추체험하게 해주는 저자의 깊이 있는 안내는 “여름의 싱싱한 빛”처럼 강렬하고도 환하다.
“교수께서 이 한국 젊은이를 지도하게 된 것은 뜻하지 않은 기회입니다.”
작가와 작품을 만나는 여정 사이사이, 김화영 교수는 젊은 날의 추억과 그때의 인연을 찾아간다. 1969년 낯선 나라에 도착해 어려움을 겪던 그는 엑상프로방스 대학 불문과의 사무를 총괄하던 알리스 모롱 부인의 지도 덕에 레몽 장 교수를 사사한다. “교수께서 이 한국 젊은이를 지도하게 된 것은 뜻하지 않은 기회입니다”라는 간결한 추천서. 그때부터 모롱 부인은 그의 “영원한 후견인”이 되었다. 아흔을 앞두었으나 여전히 정정한 모롱 부인과 김화영 교수의 40여 년간 이어진 인연. 그 옛날, 첫딸의 아기 옷을 선물해주었던 모롱 부인은 그 아기가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두 살 난 아기의 엄마가 되어 나타나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프레 카틀랑 공원에도 추억이 있다. 1977년 여름, 첫아이를 가진 만삭의 아내와 함께 저자가 처음 찾았던 공원이다. “초록빛 임부복 차림으로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가던 앳된 아내의 뒷모습이 어제인 듯 눈에 선하”고, “35년의 세월이 흘러 그때 뱃속에 있던 아이가 어머니가 된 지금”, 저자는 “머리가 희끗해지려는 초로의 아내와 다시 인적 없는 공원을 호젓이 걷는다.”
이렇듯 이 책 곳곳에는 한 학자의 세월이 스며 있다. 그 시절을 함께한 사람들, 마음을 뒤흔들었던 것들, 되돌릴 수 없는 젊음과 열기는 눈을 감고 음미할 문장으로 남았다.
저 앞에 앉아 밤새 사나운 미스트랄 소리를 들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그 친구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삶이 우리를 갈라놓고 그 사이로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냈다. 그 길 위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갔다. 올리브가 익고 무화과가 터졌다. 개양귀비꽃들이 핏빛으로 들판을 물들였다. 그리고 세월은 우리 모두의 얼굴을 할퀴며 주름살을 남겼다.
_15쪽, 「생 레미의 알리스 모롱 부인」 중에서
“왼발이 앞으로 나가고 오른발이 아직 뒤에 있을 때 그 중심에 머무는 몸의 짧은 순간, 전신의 모공을 열어 빨아들이는 세상의 빛과 냄새와 소리와 감촉, 그것이 여행이다.”
김화영 교수가 보낸 두 번의 여름은, 누구나 떠날 수 있지만 누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