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화된 글쓰기에 의한 삶의 재구성
레리스는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기록했다. 평소 수첩을 가지고 다니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들과 그날그날의 생각과 일들을 기록하고, 그것을 일기에 옮겨 쓰고, 또 카드에 정리하여 주제별로 분류해두었다가, 그렇게 모은 카드에 근거하여 자서전을 썼다. 그리고 옮겨 쓰는 과정에서 자서전적인 성찰의 글쓰기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왜 쓰는지를 곰곰이 따졌다. 그리하여 그가 생전에 출판했던 자서전은 모두 7권에 이른다.
그의 첫 자서전 『성년』은 이후에 쓰인 자서전을 지탱하는 버팀목이며, 글쓰기와 주체성에 대한 개념 등에서 루소 이후 전형화된 근대적 자서전과는 다른, 독창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그의 자서전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으로 일목요연한 삶의 이야기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의 자서전은 연대기적인 흐름을 따르지 않고 강렬한 순간들을 기록한 시적 시간관념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성년』은 일정한 주제 아래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서로 관계없는 것처럼 배치되어 있다. 레리스는 읽었던 책, 관람했던 연극이나 오페라, 혹은 그림의 제목이나 주인공의 이름을 별다른 설명 없이 나열하거나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장면을 전후 맥락 없이 서술하기도 한다. 작가 스스로 ‘초현실주의적 콜라주’나 ‘포토-몽타주’라고 이름 붙인, 파편화된 글쓰기 방식은 전혀 친절하지 않아서 작가가 문화적 에피소드들을 어떤 각도에서 인용하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암중모색하듯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주제에 몰입하기보다는 자꾸 가지를 치며 번져가는 듯하다가, 결정적인 어느 순간에는 슬그머니 중단되어버리는 듯한 그의 텍스트를 읽으며, 독자는 작가의 서술 전략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한 사람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왜 이렇게 많은 여분의 지식이 필요한 것인지 당혹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삶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로서의 글쓰기’
‘성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투우사처럼 죽음의 위기를 무릅써야 한다. 레리스는 죽음을 무릅쓰는 투우사는 못되지만 자신의 삶에 “황소 뿔의 그림자라도 드리우기를” 원한다. 그리고 삶에 위험을 부과하는 수단으로 자신의 삶을 고백하기, 더 나아가 자기에 대한 글쓰기를 선택한다. 그에게 글쓰기는 세 가지 의미에서 행위가 된다. 자신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한 행위라는 점에서 글쓰기는 ‘나’에 대한 행위이며, 책을 출판하면 타인과의 관계가 변할 것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행위이고, 다소간 은폐되어 있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의미를 규정하는 데 쓰일 수 있기 때문에 문학에 대한 행위이다. 그러나 글쓰기를 행위로 간주한다고 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행위로서의 글쓰기는 일정한 방향이 있어야 하며, 그 방향은 나와 타인과 문학을 ‘위태롭게’ 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레리스는 삶의 진실을 죽음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러나 탄생은 물론이고 자기 죽음을 기술할 수 있는 자서전 작가라는 건 있을 수 없다. 게다가 그는 (몇 번의 자살기도가 있기는 했지만) 두려움 때문에 자살하지 못하며 죽음의 장면을 ‘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오페라 극장에서 죽음의 장면을 보려고 해도 그의 가족이 앉는 자리는 2층의 한쪽에 치우쳐 있어서 무대의 절반이 보이지 않는 관계로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목 잘린 마르그리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이 좋은 예다. 그 불가능성 때문에 그는 삶을 전적으로 살지 못하고 반쯤만 경험했다는 낭패감에 사로잡힌다.
*‘게임’으로서의 에로티시즘
죽음의 경험을 대체할 만한 것으로 레리스에게 떠오르는 것이 에로티시즘이다. 그는 사랑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을 얻었으니 “이제 사랑에 대한 실천적인 지식을 얻는 힘든 일만 남았다”라고 말하면서 사랑의 실천을 성년에 도달하는, 거의 유일한 방식으로 제시한다. 물론 사랑의 실천은 성관계를 의미한다. 게다가 에로티시즘은 그의 비겁함, 비열함, 죽음과 성적 환상, 무기력과 징벌의 욕망을 가장 잘 보여주는 특권적인 주제라는 점에서 레리스가 성취하고자 했던 ‘행위’가 될 수 있다. 레리스가 에로티시즘의 관점에서 동성애, 실패한 연애체험, 근친상간적 욕망, 성적 방종의 일화들을 빠짐없이 서술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그 체험들은 그가 미리 설정한 방향, 즉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의도에 충실하게 서술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케이와 처음으로 관계 맺는 장면은 왜 성행위가 불가능한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에 따르면 성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남성으로서 유혹하는 역할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 행위의 성적인 특성이 사라져야 한다. 그는 그 상황을 연극이나 놀이처럼 제시한다. 그는 케이와 옷을 바꿔 입고, 케이가 그를 여성화된 이름인 ‘미슐린’으로 부르고, 케이가 주도하는 대로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어야 한다. 에로티시즘을 영웅이 될 수 있는 드문 기회로 여기던 레리스로서는 여성의 역할을 떠맡아야 하는 이 모든 상황이 치욕적일 수밖에 없다. 기대와는 반대로 에로티시즘의 영역에서 그는 에두른 죽음, ‘수치심’이라고 하는 부정적인 차원의 죽음을 경험한다.
레리스는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불가능성을 끈질기게 응시함으로써 시인이 된다. 죽음을 실행할 용기가 부족한 자신을 비웃는 모습을 수치스럽게, 부끄럽게 서술하는 그 용기로 인해 그는 자신을 비극적 인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레리스는 영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고발함으로써, 수치심을 반복 재생산하는 진정성 속에서, ‘문학적 영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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