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 을밀대 위의 강주룡부터 부산 85호 크레인 위의 김진숙까지 일하는 여자들이 쌓아온 전투적 노동운동의 역사
# 하늘 높이 올라서야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여자들의 이야기
# ‘형제’에서 제외된 마이너리티들의 이루지 못한 꿈과 열망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식민지 시기 평양의 을밀대에 올라 고공 농성을 벌인 고무 여공 강주룡부터 2011년 부산의 35미터 크레인 위에 오른 용접공 김진숙에 이르기까지 한 세기에 걸친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사를 통해 여성 노동운동의 기억들을 복원하고 한국의 산업화와 노동운동의 역사를 페미니즘 관점에서 다시 쓴다. 역사학자 남화숙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시기마다 창의적인 방식으로 전투적으로 투쟁하며 계급의식과 페미니스트 의식을 발전시켰던 여공들의 연대기를 통해 이들을 산업화 과정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 어엿한 주체로 복원해 낸다. 식민지 조선의 엄혹한 조건에서도, 해방 후 노동법이 형성되는 결정적 국면에서도, 권위주의 시대 극도로 폭력적인 탄압 속에서도, 그리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압력 속에서도, 자신의 꿈과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여성들의 연대기.
⊰ 우리, 일하는 여자들의 한 세기 ⊱
∗강주룡-김진숙을 연결하는 페미니스트 역사 쓰기∗
“1980년대 후반, 여성운동과 학생운동을 경험한 연구자로서 나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설명하는 논의들을 마주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활동가들과 진보적인 학자들은 새롭게 등장한 이들의 노동조합운동을 축복하면서 이전 시기 여성이 주도했던 노동자 투쟁에 비판의 시선을 돌렸다. 이 불공정한 관점에 맞설 효과적인 대항 서사를 꾸릴 언어나 도움이 될 전거를 찾지 못한 나는 좌절감 속에서 식민지 시기 여성운동 연구를 접고 한국 노동사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한국 사회운동의 젠더 관계가 어떤 경로를 거쳐 그런 결과를 낳게 되었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그때 그대들이 없었더라면...?’ 민주노조 운동의 큰언니 격인 이철순이 던진 이 질문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자 책을 닫으며 독자에게 남기고 싶은 질문이다. 이 책에서 소개한 여공들의 한 세기에 걸친 여정을 따라가면서,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어려운 과제를 모두 달성한 대한민국의 ‘성공’을 상상할 때 사회의 양심과 민주적 약속에 호소하면서 노동자에 대한 정의와 존중을 요구하며 싸운 여성 노동자들의 역할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기를 바란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소망한 것은 여공의 시선으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새롭게 조명하고 그들의 기여를 재평가하는 것이었다.”
여성 산업 노동자, 즉 여공들의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최근 십수년간 전순옥, 재니스 김, 김승경, 김원 등 국내외 연구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진행돼 왔다. 이 책은 이와 같은 연구들을 밑거름 삼아 식민지 시기부터 현재까지 100여 년에 걸친 여성 노동운동의 장기 역사를 제안하는 야심 찬 기획으로 2022년과 2023년 존페어뱅크상과 제임스팔레상을 수상했다. 산업화 시기 조선소 남성 노동자들의 노조 운동을 분석한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를 통해 개발독재가 만들어낸 ‘국가-자본-노동’ 관계 속에서 생계부양자 역할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욕망이 투쟁의 결정적 동력이었음을 보여 주었던 저자는 이제 시대를 관통하며 페미니즘 관점에서 바라본 노동운동사의 유효성을 증명해 낸다.
한국학 분야의 대표적인 노동사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저자가 애초부터 노동사를 전공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식민지기 여성운동사를 연구하던 그가 방향을 튼 것은 과거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여성들에 대한 부당한 비판을 마주하고서였다. 이에 맞서 “효과적인 대항서사를 꾸릴 언어나 도움이 될 전거”를 마련하기 위해 한국 노동사를 공부하기로 결심한 저자는 그 순간부터 오랫동안 “20세기 한국사를 노동과 젠더에 초점을 맞춰 다시 쓰는 작업”을 꿈꿔 왔다. 특히 이 책을 완성으로 이끈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2011년 김진숙의 크레인 농성과 한 세기를 넘어 다시 소환된 강주룡이었다. 시간적 간극을 초월한 두 여성 노동자의 연결성에 매료된 저자는 식민지기 평양의 고무 공장, 해방기 부산의 방직 공장, 산업화 시기 민주노조를 이끈 여성노동자들, 그리고 민주화 이후 계속해서 주변으로 밀려나다 비정규직 장기 투쟁 사업장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여성들의 연대기를 완성해 냈다.
∗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교란하는 ∗
⊰ 여성 주체의 전투성 ⊱
“나는 평원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끗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 근로대중을 대표하야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 1931년 5월 29일 아침 을밀대 지붕 위에서 강주룡
“3월 12일 오전 8시, 주야 근무가 교차하는 시간, 6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한꺼번에 공장 정문으로 쏟아져 나와 경찰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노조 위원장이자 조방 대한노총 노조의 설립자 안종우는 단 하루 만에 파업을 조직하는 어려운 임무를 “치밀하고 민첩”하게 수행해 낸 이외선 등 여성 노동자들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 이 여성들은 공장 내 평조합원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회사 측 추산으로도 주간 근무자의 약 81퍼센트가 파업에 참여했다. 공장의 철문은 노동자들의 몸에 밀려 넘어졌고, 경찰이 정문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로 설치한 10여 대의 트럭은 여성 노동자들의 습격으로 ― 그 안의 경찰을 꼬집고 물면서 끌어냈다고 한다 ―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간 식민지기 여성들의 노동운동은 물질적 빈곤에 대한 단순한 반발로 사상적・정치적 기반이 부족한 운동으로 평가절하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가 발굴해 낸 여성 노동운동가들의 전기는 이들을 다양한 가능성들이 열려 있는 정치경제적 조건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 주체로 재고하게 만든다. 1920, 30년대 노동운동의 고양기에 여러 사회운동의 각축장이었던 평양에서 다양한 자양분을 흡수해 나가는 강주룡의 성장기는 특히 상세한데, 이를 통해 저자는 신여성처럼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계급의식과 정세 판단에 입각한 달변으로 사람들을 휘어잡은 강주룡의 능력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한다. 무엇보다 남화숙은 ‘적색 노조’와의 연관 속에서 그가 “엘리트의 선동”에 넘어간 “무지한 여공”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조선인 민족주의 엘리트와 사회주의 운동, 아나키스트 등이 혼재하는 복잡한 운동 진영 속에서 그녀가 체험을 통해 스스로 획득했을 ‘해방의 지식’에 대한 독자들의 상상을 부추긴다. 강주룡은 적색 노조와 연관된 기간이 짧고, 그전에 이미 파업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엘리트의 도움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적 자의식을 갖춘” “공장 여성”이라는 주체의 등장을 보여 주는 것. 이는 강주룡과 동료들이 “아사동맹”을 조직하고 “곱비끈흔 노우와가티” “공장을 습격”하며 “파업깨기꾼의 출퇴근을 방해”하는 등의 강도 높은 투쟁을 전개하는 양상에서도 잘 재현된다.
이 같은 여성 노동자 주체의 전투성은 해방 정국 부산의 조선방직(조방) 투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민란을 방불케 한 분규”로 평가받는 조방 쟁의에서 1천여명에 달하는 조방 여성들은 전시 수도 부산의 임시국회 건물 앞에 이 모여 데모를 하고 가두시위를 벌였고, 단 하루 만에 6천여명이 참여하는 파업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조직적이었다.
당시 여성들에게 이 같은 공장 일자리는 상대적으로 고수익이었고 안정적이었다는 점에서, 또 전시 상황에서 이런 일자리를 잃을 경우 “사회의 밑바닥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고려할 때, 이들이 해고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투쟁의 최전선에서 수개월을 버텨 낸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파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