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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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사진이 부르는 어떤 기분 그 한쪽 어깨에는 컬러필름이 장전된 카메라를, 다른 어깨에는 흑백필름이 장전된 카메라를 메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처음에는 매번 같은 자리에서 컬러로도, 또 흑백으로도 찍었다.
그런 탓에 두 필름에는 일란성 쌍둥이처럼 약간의 시차를 둔 똑같은 장면들이 담겼다. 하지만 찬찬히 바라보면 그 두 장면은 이란성 쌍둥이처럼 서로 달랐다. 아무리 같은 장면을 찍어도 한쪽은 컬러이고, 다른 쪽은 흑백이니 결과물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카메라를 바꾸는 그사이에도 광선이나 공기는 수시로 변했기에 두 장면의 분위기는 미묘하게 달랐다. 게다가 비록 같은 장면 앞에서라도 컬러일 때와 흑백일 때 나는 조금씩 다르게 반응했다. 컬러일 때는 프레임 안에 하늘이 많이 차지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흑백필름일 때는 하늘의 비중이 커질수록 섀도 부분의 노출에 신경을 썼다. 자칫하면 실루엣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노출을 더 주거나 플래시를 사용하기도 했다. 한 프레임 안에 녹색과 빨간색 피사체가 함께 있다면, 흑백필름에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흑백에서는 둘다 모두 블랙으로 표현될 테니까. 하지만 컬러필름일 때는 보색인 두 색감이 조화를 이룰지 더 신경 써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자 두 카메라는 점점 같은 장면을 찍지 않게 되었다. 이런 순간에는 컬러보다 흑백이, 저런 순간에는 흑백보다 컬러가 더 효과적이라는 나름의 경험치가 쌓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컬러와 흑백 두 카메라가 향하는 곳이 아예 다르다는 걸 결과물을 통해 확인한 이후로는 굳이 반복해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흑백필름일 때 나의 시선은 땅바닥에 붙어 있었고, 컬러필름일 때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했다. 그렇게 찍은 장면들 중에서, 물이 마른 분수대에 헤엄치는 콘크리트 물고기 조형물의 처량한 아이러니는 컬러필름이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 같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에는 카메라를 준비하고 매직아워를 잔뜩 기다리곤 했는데, 흑백필름이었다면 그 짧은 시간 동안 하늘이 지닌 모든 색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컬러에서만 보였던 순간들, 흑백에서만 볼 수 있었던 장면들, 어깨에 매달린 두 카메라는 나의 눈동자를 서로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다분히 사진적인 재현으로만 가능했던 컬러의 세계와 흑백의 세계에서 나는 현실이라면 보이지 않거나 놓쳤던 것들을 붙잡아 바라볼 수 있었다. 이번 호의 여정은 사진으로만 시각화되는 어떤 사실을, 흑백에서만 가시화되는 어떤 진실을 다시 떠올리면서 출발한다. 그것이 현실의 사실과 진실에 그대로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흑백사진의 세계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어떤 기분을 선사해 주기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