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거장의 영화를
시나리오로 보고 읽다
어떤 설명이나 수식이 필요없는 씨네아스트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다큐멘터리 《타르콥스키, 기도하는 영혼》(2022) 시나리오집 출간에 이어, 1999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로제타〉), 2005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더 차일드〉), 2008년 칸 영화제 각본상(〈로나의 침묵〉), 2011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자전거 탄 소년〉)등 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오른 다르덴 형제의 시나리오가 알마에서 출간된다.
벨기에에서 나고 자란 두 형제 감독은 사회에서 불안정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나 눈에 띄지 않는 어두운 존재 등을 주인공으로 삼아 사회적인 주제를 다룬다. 대부분 영화의 스토리는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오기에 현실적인 면이 강하게 부각된다. 영화를 제작하는 현장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만큼 영화의 장면은 현실감이 생생하다.
그러나 벨기에는 이곳에서 멀고, 그들의 영화 현장은 다가가기 힘들다. 그 대신 시나리오를 통해 그들의 영화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영화를 직접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나리오집을 읽는 것은 영화를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특히 영화 장면과 시나리오가 다른 부분을 찾아가며, 왜 이 부분은 다르게 표현했는지 상상하고 곱씹어보면 다르덴 형제가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어 했던 주제 의식이 좀 더 선명해진다. 무엇이 중요했고, 달리 표현하면서 어떤 효과를 획득했는지 찾아내는 작업은 시나리오를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르덴 형제의 다큐적 화법은 시나리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렇기에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시나리오집을 읽는 것은 그들의 창작의 뿌리를 보는 것과 다름없다.
사회문제와 인간 내면에 대한 짧지만 묵직하고 날카로운 시선
다큐보다 더 사실적인 두 형제의 영화 읽기
다르덴 형제는 다큐적 화법의 긴장감과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대부분 롱테이크나 핸드헬드로 촬영한다. 흔들리는 화면을 고스란히 담지만,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배우와 그 동선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충돌하지 않는다. 갑작스레 손을 내밀면 그 자리에 사건을 이어가는 소도구가 놓여 있거나, 주인공이 얼굴을 찡그리면 상대 배우는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에 반응한다. 물 흘러가듯 자연스레 화면이 흘러간다. 도대체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내는지 그 현장이 궁금할 정도다. 이런 자연스러움이 다르덴 형제의 주제 의식을 더욱 부각한다.
한편,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는 늘 빈곤이 등장한다. 〈로제타〉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 일자리와 사랑을 바꾸고, 〈더 차일드〉에서는 친권을 포기하며, 〈로나의 침묵〉에서는 결혼과 시민권을 맞바꾸며 돈이 오간다. 자본주의라는 냉혹한 사회의 룰을 따라 살아가고 사랑하고 혹은 연민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이런 식으로 빈곤이라는 문제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차원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다르덴 형제는 빈곤은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며, 이는 언제나 구체적인 현실이라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빈곤은 몸에 고통을 주고 상처를 남길 뿐 아니라, 영혼과 마음까지 고사시킨다. 다르덴 형제는 그 과정을 담담히 담아내는데, 그렇다고 해서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관객들이 그들의 영화를 보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기를, 왜, 어떻게를 고민하길 바란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우리 영화를 보고 오해합니다. 관찰은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나면 당신이 질문하기를 바랍니다.”
_ 다르덴 형제
… 그리하여 베토벤이 두 번 흐른다
다르덴 형제의 시나리오집에는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해설이 실려 있는데, 영화 장면과 시나리오를 오가며 영화를 설명한다.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해설을 읽다보면 a4용지 수십 장을 들고 언제나 열정적으로 강연하는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재생되는 것만 같다. 특히 그가 강조한 지점은 두 영화에서 흐르는 베토벤의 음악이다. 음악가로서 겪어야 했던 좌절이 베토벤의 음악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주었듯 두 영화에서 흐르는 베토벤의 음악은 관객들로 하여금 주인공 내면에 더 깊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한다. 정성일의 해설은 음악이 영화에 어떤 효과를 더해주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짚어주기 때문에, 영화를 다시 보면 그 음악이 다시 들리고 달리 보일 것이다.
〈로나의 침묵〉의 마지막 장면에서 숲속 오두막에 조용히 누운 로나의 모습은 ‘백설공주’의 새로운 버전 같기도 하고, 늑대를 피해 몸을 숨긴 ‘빨간 망토’ 같기도 하다. 이때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마지막 번의 마지막 악장이 눈물겨울 만큼 아름답게 흐른다. 익숙했던 오래된 음악이 새로운 스토리를 입고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자전거 탄 소년〉에서 흐르는 베토벤은 〈피아노 협주곡 5번〉의 2악장 아다지오다. 우리에게는 ‘황제’라는 부제로 더 유명하지만, 어쨌든 그 제목과 이 영화는 관련이 없다. 그 제목조차 베토벤이 붙인 것이 아니니 그저 선율의 아름다움이 영화의 장면과 어떻게 어우러지는지만 느끼면 된다.
〈자전거 탄 소년〉에서 음악은 네 번 흐른다. 시릴이 보육원을 도망치려다 잡힌 날 밤 ‘지친 짐승처럼’ 잠들었을 때, 시릴의 아버지를 찾아갔으나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돌아오던 길에서 자해할 때, 강도짓한 돈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갔으나 거부당한 시릴이 사만다에게 돌아가는 길, 강도짓의 피해자를 마주쳤을 때 아들이 시릴에게 돌을 던져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사만다에게로 돌아가는 길에서다. 친아버지에게 거부당하고 위탁가정의 어머니에게 돌아가면서 흐르는 음악은 길을 잃지 말라고 불러주는 어머니의 노래다.
베토벤의 음악은 딱딱하지도 넘치게 감상적이지도 않으면서 적절하게 장면과 어우러져 영화의 주제를 드러낸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사실적이지만 차갑고 날카롭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런 연민의 시선을 놓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알마의 영화 시나리오집
알마에서는 세계적인 거장의 영화 시나리오를 계속해서 선보일 예정입니다.
출간작
《타르콥스키, 기도하는 영혼》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지음, 이다혜 옮김
출간예정
《로제타, 더 차일드》 장 피에르 & 뤽 다르덴
* 알마의 영화 시나리오집은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