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강간범이고, 누가 오빠일까”
‘눈을 뜨고’ 죽은 여성의 관점에서
한국영화사의 대표작 한 편을 아카이브와 역사의 관점하에 비평적 해석으로 집중 탐문하는 KOFA 영화비평총서의 두 번째 권. 엔딩의 박두만(송강호)은 무엇을 응시하는가!
저자는 이 책을 쓸 때 인터넷 창에 범인의 얼굴을 띄워 두고 멍하니 들여다보곤 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눈을 감지 못한 채 죽은 희생자들이 마지막까지 응시한 얼굴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실화의 그림자를 떨쳐 낸 한 편의 허구로 새롭게 읽어 내겠다, 한국식 스릴러로서 봉준호가 성취한 독창적인 미학의 활기를 재발견하리라. 그러나 영화를 다시 보고, 장면들을 거듭 떠올리며 글을 쓰는 동안, 어쩔 도리 없이 깨달은 바는 따로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이 영화에 대한 모순된 심정이었다. 불편해하면서도 넋 놓고 감탄했고, 킥킥대면서도 울렁대는 속을 마주했고, 서스펜스에 사로잡히면서도 진저리 친. 영화의 모진 자문에는 뼈저린 자극을 받았으나, 비애감에는 종종 마음이 닫혔다고 한다. 한국 사회를 사는 여성 평자로서 느낀 분열이었을까...라고 저자는 한 발 물러서지만, 이 자타공인 “올해의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촬영상, 편집상, 최다관객상, 최우수작품상, 신인감독상, 조명상, 인기상…”에 빛나는 한국영화를 보며 복잡한 마음이 들었던 이유는 왜일까?
하염없이 범인을 찾아 헤매는 남성성의 세계
뛰어난 만듦새와 정치성을 지닌 작품답게, 이 영화는 개봉 직후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쟁점을 낳고 있다. 평자들은 묻는다. 범죄스릴러가 한국 사회와 만나 장르의 쾌락을 무너뜨린 게 아니라, 더 원초적이고 강력한 ‘체념’의 쾌감에 복무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사건의 기반인 가부장제 구조를 지우고 침묵하는 여성 시체에 1980년대 한국사회라는 역사적 맥락을 채워 넣은 “왜곡된 남성 무용담”은 아닌가. 여성의 시신은 널려 있지만, 여성의 언어는 부재하지 않는가. 봉준호는 서투른 해결보다 모든 걸 다 드러내서 세계 자체가 미쳐 있다는 것을 싸늘하게 말하는 방식을 택한 것일까. 저자는 <살인의 추억>을 둘러싼 기존의 다양한 논의를 정리하는 한편 때로 그 견해들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 영화에서 새롭게 발견한 성취를 주목한다. <살인의 추억>이 날카롭게 주시하는 방향은 여성을 구하지 못한 남성의 죄의식이 아니라, 구할 수 ‘없는’ 남성성의 모순과 궁지라고. 영화 결말 속 스크린 바깥을 응시하는 송강호 얼굴 클로즈업은 회한이나 후회, 공포나 불안의 감정보다 무지로 살아남은 남성성의 힘으로 진동한다고. 에필로그 속 소녀가 언급한 얼굴의 '평범함'은 가부장제에서 소위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남성성 일반을 겨냥하며, 영화 속 형사들과 어딘가에 존재할 범인 모두를 포괄하는 게 아니냐고. 이보다 매서운 자기인식이 어디 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