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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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물건 되겠다 싶데” 백수린 첫 소설집 『폴링 인 폴』 출간되다 “작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백수린이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발표한 단편 「폴링 인 폴」을 읽었어요. 물건 되겠다 싶데. 서른 조금 넘은 여자가 주인공인데, 외국인들한테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야. 미국 교포 2세 청년이 그 제자인데, 이 여자가 그 청년의 서툰 한국어 발음이 충청도식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차리지……”(최재봉 기자의 그 작가, 그 공간 ⑧김윤식의 ‘책의 나라’, 한겨레 2012년 1월 13일) 작가의 창작 공간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인터뷰에 우연히 등장한 한 신인 소설가의 이름 ‘백수린’. 매 계절마다 발표되는 소설들을 빠짐없이 따라 읽으며 꾸준히 월평을 발표해온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이 신인 소설가를 문예지를 통해 다시 한번 언급하게 된다. “다음 장면이 설사 사실이든 아니든 적어도 방법론상 아름답지 않다면 이는 거짓말. 흡사 ‘물!’이라는 말(세계)을 처음 깨친 헬렌 켈러의 체험에 방불한 것이니까. (……) 비평적 포인트. 다국적 시대의 삶이라면 소설은 이를 선취해야 하는 법. 어학 연수차 파리에 간 이야기인, 이 작가의 신춘문예 당선작 역시 ‘소통’의 문제였던 것.”(『문학사상』 2012년 1월) 한국 현대문학사와 함께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비평가로부터 이와 같은 찬사를 받았을 당시, 백수린은 2011년 경향신문에 단편소설 「거짓말 연습」이 당선되어 등단한 지 겨우 일 년밖에 되지 않은 신인 소설가였다. 그녀는 심사위원들로부터 소통이 부재하는 현실이라는 의미심장한 주제를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일의 어려움이 무색하도록, 신인답지 않게 시종 일관된 호흡을 유지하며 안정감 있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작가로서의 그 첫 출발을 알렸다. 대개 신인의 등장은 그에게 기대를 거는 이들의 벅찬 마음으로 인해 다소 요란한 수사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기본기가 충실하며 무게중심이 잘 잡혀 있다는 평가만큼 한 신인의 미래를 어떤 의구심도 없이 밝은 마음으로 기대할 수 있도록 만드는 심사평도 드물다. 우뚝한 등장만으로 한국문학 독자들을 든든하게 만든 신인 소설가는 당선 인터뷰에서 경계에 놓인 이름 없는 존재들에 관심이 많다고 고백하며 그런 존재에 제 이름을 찾아주고 무엇보다 인간에 대해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그로부터 삼 년 뒤인 2014년, 소설에 대한 믿음과 열정으로 성실하게 쓰여진 아홉 편의 이야기들을 묶은 첫 소설집 『폴링 인 폴』이 마침내 출간된다. 두 편의 등단작, 믿어도 좋을, 아니 믿을 수밖에 없는 소설가 특이하게도 백수린에게는 두 편의 등단작이 존재한다. 2010년 가을 『자음과모음』 에 발표한 작품 「유령이 출몰할 때」와 신춘문예 당선작 「거짓말 연습」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편의 소설들로부터 우리는 백수린의 소설적 출발점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게 된다. 열렬한 운동권도 그렇다고 극성맞은 취업권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는 젊은 세대의 감수성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작품 「유령이 출몰할 때」. 백수린은 이 소설에 새로운 것들이 범람하는 세계에서 자신의 방식과 삶의 태도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선배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후배의 시선을 등장시킨다. 그 시선의 신중함과 다정함이 인상적인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후배인 내가 선배와 함께 ‘유령’에 맞서 카페 카르페디엠을 온몸으로 껴안는 것이다. 바닥에 엎드려 두 팔을 활짝 편 채로 카페를 껴안은 나의 모습은 앞으로 이 젊은 작가가 거친 세계에서 스스로를 지탱해나갈 윤리적 태도로 보인다. 또한 말들이 너무도 빠르게 넘쳐나 그것의 불확실성과 진실성을 묻는 일이 철지난 일처럼 여겨지는 지금, 그녀는 또다른 등단작 「거짓말 연습」을 통해 소통의 가능성과 그것에의 의지를 근본적으로 묻고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말로 내뱉어지는 순간 마음과 무관하게 진실이 휘발되어버리는 대화의 속성을 섬세하게 그려 보이면서,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어 마음을 건네면서 살아가는 일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밑바닥을 이처럼 단단하게 다져나가는 모습은 이야기를 만드는 소설가로서 그녀의 미래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두 편의 소설은 마침내 그녀가 딛고 설 이야기의 땅이 시간의 광풍에 쉽게 무너지거나 휩쓸려 내려갈 성질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한국말도 사랑에 빠지다, 이렇게 말하는 거라면서요. 영어도 fall in love인데.” 한국어로도 영어로도, ‘사랑’은 빠져드는(falling in) 것, 폴링 인 백수린 그리고 직물처럼 정교하고도 단단하게 짜인 일곱 편의 이야기들이 있다. 이야기는 대개 등장인물의 언어와 기억에 작지만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중심에 놓고 서사를 전개해나간다. 소설집의 문을 여는 「감자의 실종」은 ‘개’를 ‘감자’로 바꾸어 인식하게 된 여자의 혼란을 다루면서 세계와 관계 맺는 일의 어려움을 드러낸다. 단어가 뒤바뀌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들이 백수린식 위트와 섬세한 언어적 감수성을 보여준다. 2012년 『젊은 소설』이라는 단행본으로 묶이면서 독자들에게 백수린을 가장 널리 알리 작품인 「밤의 수족관」은 아이와 함께 톱스타인 남편을 기다리는 여자의 목소리만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면서 과연 여자의 기억을 신뢰해도 좋은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독자를 이끄는 수작이다. 소설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꽃 피는 밤이 오면」은 일인 시위를 벌이는 여자의 곁을 지나쳐버린 후 말을 잃어버리게 된 남편과 그를 지켜보며 생활을 견뎌나가는 아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의미를 알기 어려운 남편의 ‘말’을 그대로 문장으로 옮겨놓으면서 백수린은 아내의 고통스럽고 슬픈 마음을 독자에게 전이시키는 데 성공한다. 언어와 기억의 문제는 한 사람의 중심을 뿌리째 뒤흔들어놓고 세상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 마치 물살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식물의 연약한 잔뿌리들처럼 백수린은 인물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외면 없이 백지 위에 그려 보인다. 하지만 흔들리면서도 뻗고 딛고자 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을 때, 그 존재는 마침내 탈바꿈되어 수중식물처럼 존재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보여주는 애처로움과 그 속에서 자라나는 어떤 단단한 힘을 우리는 믿는다. 한국어로도, 또 영어로도, 무언가에 빠져드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 시작되는 일과 같다. 폴링 인 백수린. 이제, 백수린과 백수린의 첫 소설집에 빠져들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