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마키아벨리,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최고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작가, 정치가, 정치이론가였다. 1498년 30세의 나이로 피렌체 공화정에 참여하여 외교사절의 임무를 띠고 프랑스 루이 12세의 궁정에 파견되었다. 당시 피렌체 사신의 주된 임무는 피렌체의 피사 공격과 관련하여 프랑스의 군사적 협력을 구하는 것이었다. 1503년에는 로마에 파견되어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를 근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율리우스 2세는 직전 교황인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의 아들인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의 도움으로 교황이 되었는데, 이후 단호한 행동으로 세력을 불려갔다. 마키아벨리는 율리우스 2세의 처세술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훗날 집필하게 된 『군주론』은 외교사절로서 겪은 생생한 체험과 관찰에 근거한 것이다. 1512년 메디치가가 피렌체를 다시 다스리게 되면서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추방당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 해에 메디치가를 몰아내려다 실패로 끝난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투옥되기에 이른다. 곧 특사로 풀려난 그는 공직에 참여하기 위해 계획을 짜기 시작했고, 그 계획의 하나로 『군주론』을 1513년 말경에 집필했다. 하지만 책을 헌정한 로렌초 메디치(Lorenzo de Medici)는 들춰보지도 않았다고 하니 마키아벨리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다만 이 시기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들과 만나기 시작했는데, 이들과의 교류에서 공화정의 의미와 가치에 눈뜨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의 『로마사』의 처음 10권에 대한 논평을 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로마사 논고』다. 마키아벨 리의 가장 큰 저서인 이 책은 여러 면에서 독창적인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마키아벨리와 마키아벨리즘, 근대의 기원을 열다 마키아벨리가 근대 정치사상사에 남긴 탁월한 공적은, 정치가 윤리나 종교 등 다른 영역과 구분된다는 점을 명료하게 밝히고 나아가 종교나 윤리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사상적으로는 현실주의 정치사상을 대변하고 정치적으로는 당시 대두하고 있는 중앙집권화된 근대 국가의 정당성을 옹호할 수 있었다. 이는 르네상스 이래 전개되어온 세속화 경향을 정치 영역에서 철저히 추구하고 관철시키고자 한 것으로, 마키아벨리가 서양 정치사상사에서 근대의 기원을 연 인물로 평가받는 이유다. 로마와 인접국 알바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두 국가 모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각 나라의 한 가문을 선발해 아들끼리 싸움을 붙여 승패를 가르기로 했다. 로마에서는 호라티우스 가문이, 알바에서는 쿠리아티 가문이 뽑혔는데, 공교롭게도 두 가문은 혼인관계에 있었다. 각 가문에서 세 아들이 나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결국 호라티우스 가문의 한 아들이 살아남아 승리는 로마의 것이 되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집에 돌아온 그는 쿠리아티 가문의 약혼자가 죽은 것을 알고 슬피 우는 여동생을 애국적인 의분으로 죽이고 만다. 이 아들은 법정에 서지만 아버지의 변호로 면죄받는다. 이 일화에서 로마인들이 공익(국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연장선에 ‘마키아벨리즘’이 있다. 마키아벨리즘은 간단히 말해 “공익, 특히 국가이익을 위해서는 수단의 도덕적 선악에 관계없이 다만 효율성과 유용성만을 고려”하는 것을 말한다.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태도는 『로마사 논고』에서도 잘 드러난다. “절대적으로 자기 조국의 안전이 걸린 문제일 때, 정당한 것인지 정당하지 않은 것인지, 자비로운 것인지 잔혹한 것인지,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치욕스러운 것인지는 전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모든 양심의 가책을 제쳐놓고 인간은 모름지기 어떤 계획이든, 조국의 생존과 조국의 자유를 유지하는 계획을 최대한 따라야 한다. 이 이론은 프랑스인들이 국왕의 위엄과 왕국의 세력을 방어할 때 사용하는 말과 행동을 결정한다.” _ 633쪽 이처럼 마키아벨리즘의 핵심은 ‘공익’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부분을 오해한다. 즉 “어떤 개인이나 파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 또는 “사회의 삶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리낌 없이 남을 희생시키는 처세”로 말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오히려 마키아벨리가 강력히 비판했던 것이다. 물론 마키아벨리즘이 이렇게 오용, 혼용되는 데는 마키아벨리도 책임이 있다. 그가 다양한 삶의 층위에서, 즉 공적인 층위나 사적인 층위 등에서 어떤 정치적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로마사 논고』는 마키아벨리즘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공화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이 방식을 따라야 하며 젊었을 때 어떤 비범한 행위로써 특출하게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 많은 로마인들은 젊었을 때 공익을 위한 법을 제안하거나 어떤 유력한 시민을 법의 위반자로서 고발하거나 아니면 무엇인가 다른 주목할 만하고 새로운 행동을 통해 인구에 회자됨으로써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_ 6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