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출판사 제공 책 소개

“나는 내가 오로지 내 꿈들을 적기 위해서만 꿈을 꾸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세기 현대문학의 가장 도발적이고 전위적인 작가 조르주 페렉의 자기 탐구적 문학 실험 관례와 관습을 철저히 배격한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글쓰기로 20세기 프랑스문학의 지평을 크게 넓힌 조르주 페렉은 길지 않았던 작가로서의 생애 내내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무수한 경험들과 시시각각 변화하는 의식의 세계를 문학이라는 틀 안에 담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 특히 그는 사소하고 주변적인 요소로 치부되기 쉬운 일상적 사물과 공간들, 순식간에 휘발되는 생각의 파편들을 집요할 만큼 면밀히 관찰하여 분류하고 목록화함으로써 찰나의 순간을 언어 속에 영구화하는 작업에 골몰했다. 작가의 이런 관심과 성향에 비추어봤을 때 그가 자신의 무의식이 밤새 만들어내는, 그러나 여명과 함께 희미해져버리는 꿈의 세계를 포착하기 위해 몇 년에 걸쳐 ‘꿈 일기’를 썼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일처럼 느껴진다. 조르주 페렉 선집의 마지막 7권으로 출간된 『어렴풋한 부티크』는 페렉이 1968년 5월부터 1972년 8월 사이에 꾸었던 124개의 꿈을 일련의 번호를 매겨 엮은 책으로, 스스로의 내면을 끈질기게 들여다본 자기 탐구의 결과물이자 미로 같은 작가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롭고 귀중한 텍스트이다. 작가가 자신의 꿈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작중에 이니셜로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실존했던 페렉의 지인들이고 지명이나 장소 역시 실제로 페렉이 살았거나 방문했던 곳임을 고려하면 이 책에 기록된 꿈의 세계가 작가의 사적 경험과 기억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각 꿈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 주요 사건과 관련한 전기적 사실이나 배경지식을 상세히 담은 역자 조재룡 교수의 주석은 이 작품을, 나아가 한 작가의 삶을 더욱 깊숙이 탐구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출발점도 도착점도 없는 무의식의 미로 속에 퍼즐 조각처럼 흩어진 124개의 꿈에 대한 사적이고 시적인 기록 한번 사용했던 기법이나 체계는 절대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는 철칙 아래 매 작품마다 기발하고 파격적인 형식을 선보였던 페렉에게 문학이라는 그릇은 단단하고 규격화된 무엇이 아니라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유연한 그물 같은 것이었다. 작가에게 르도노상을 안겨준 첫 책 『사물들』에서부터 반짝였던 그의 실험 정신은 1967년 울리포(OuLiPo, 잠재문학실험실)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더더욱 꽃을 피웠다. 그해 페렉은 ‘너’라는 이인칭시점에서 쓴 사회학적 자전소설 『잠자는 남자』를 발표하며 다시 한번 탁월한 언어 감각과 남다른 재능을 인정받았다. 『어렴풋한 부티크』에 등장하는 꿈들은 페렉이 울리포에 가입한 이듬해부터 시작해 그가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작품세계를 본격적으로 확장하던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알파벳 ‘e’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쓴 리포그람 소설 『실종』(1969), 반대로 ‘e’를 유일한 모음으로 사용한 소설 『돌아온 사람들』(1972), 자전적 사실과 허구적 소설을 결합해 쓴 『W 또는 유년의 기억』(1975)은 모두 이 시기에 탄생했다. 페렉의 애독자라면, 꿈을 기록할 당시 이미 출간되었거나 작업중이었던 작품들이 어떤 식으로 변형되어 꿈속에 등장하는지를 지켜보는 재미 외에도 이 미로의 어딘가에 분명히 심겨 있을 이후 작품들의 씨앗을 발견하는 기쁨 역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다채로운 작품들이 자라난 토양으로서, 꿈을 매개로 드러난 페렉의 무의식은 그의 작품세계를 빼닮은 기이한 미로이자 퍼즐 같다. 이성이나 논리의 영역에서 벗어나 은유와 상징, 연상과 환유, 말놀이와 언어유희로 이루어진 미궁 속을 유영하는 작가의 꿈꾸는 정신은 그의 책을 읽는 독자와 마찬가지로 번번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예상치 못한 전개를 맞닥뜨린다. 그 충격과 불안, 두려움과 놀라움의 순간들은 때로 어떤 진실의 심연을 섬광처럼 비추며 작가를, 그리고 우리를 꿈에서 깨어나게 한다.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곧 잊힐 깨달음의 잔상만을 남긴 채로. 전지적인 동시에 관찰자적인 글쓰기, 무의식과 의식의 접점에서 쓰인 ‘밤의 자서전’ 페렉 이전에도 꿈을 통해 표출되는 무의식을 기록하기 위한 시도는 존재했다. 앙드레 브르통을 위시한 일부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이성의 간섭을 받지 않는 무의식의 영역을 포착하기 위해 반수면 상태나 최면 상태에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받아적는 자동기술법automatism을 활용하기도 했다. 다만 페렉이 『어렴풋한 부티크』에서 사용한 방식, 그리고 그 기록의 결과물은 극단적으로 해체되고 파편화된 자동기술법적 텍스트와는 거리가 있다. 이 지점에서 어떤 식으로든 언어화를 거친 무의식을 순수한 무의식이라 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거론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순수한 무의식’을 포착하는 것은 처음부터 페렉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듯하다. 이 작품은 꿈을 언어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이미 언어화된 꿈을 기록한 것에 가깝다. 다시 말해 124편의 글이 된 각각의 꿈은 애초에 글로 쓰이기 위한, ‘글로써 꾸어진 꿈’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이 책의 서문에서 꿈을 기록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꿈을 왜곡할 위험을, 나아가 자기 자신을 왜곡할 위험을 동반함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하기로 선택했으며, 급기야 “오로지 내 꿈들을 적기 위해서만 꿈을 꾸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어렴풋한 부티크』를 집필할 당시 페렉의 정신과의사였던 장베르트랑 퐁탈리스는 그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것은 순수한 꿈이 아니라 그저 이야기하기 위해 꾸어진 꿈이라고 진단했다. 아울러 페렉이 이 작품을 자전적인 자기분석이자 ‘밤의 자서전’이라 칭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결국 작가가 기록한 꿈들은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환상,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서 쓰인 일종의 자전소설인 셈이다. 그렇게 페렉은 또 한번 내용뿐 아니라 화법과 시점의 측면에서도 흥미롭고 혁신적인 실험적 글쓰기를 선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자는 곧 듣는(꿈꾸는) 자이며 그는 이 이야기의 모든 것을 설계한 자인 동시에 철저한 관찰자이다. 친숙한 것의 낯선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들, 그리움과 욕망과 두려움의 환유 속을 통과하는 몽환의 여정 페렉은 꿈을 기술하는 데 있어 몇 가지 스타일의 원칙을 세워두었다. 본문에서 줄바꿈은 무언가의 변화, 고딕체는 꿈의 도드라진 요소, 문단 사이 여백은 잊어버렸거나 해독할 수 없는 부분, ‘/ /’ 기호는 자발적인 삭제를 의미한다. 또한 양가적이거나 복합적인 상황을 기술하기 위해 때로는 두 개의 단어를 위아래로 나란히 병기하기도 하고(8번, 58번, 74번 꿈 등) 소제목이나 번호를 붙인 몇 개의 장으로 구성된 꿈도 있으며(35번, 48번, 65번, 79번 꿈 등) 어떤 꿈은 일인칭이 아닌 삼인칭시점으로 전개된다(28번 꿈). 꿈의 길이는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것부터 일곱 페이지에 걸쳐 이어지는 것까지 다양하며, 심지어 ‘창문’이라는 제목이 붙은 96번 꿈은 오직 삭제 기호(/ /) 하나로만 이루어져 있다. 내용 면에서도 페렉의 꿈들은 기상천외한 면면을 보여준다. 몇몇 평범한 상황이 묘사된 꿈들(의사에게 증상을 이야기하는 9번 꿈이나 백화점을 둘러보는 44번 꿈 등)도 있지만, 대부분은 평범하게 시작되더라도 꿈이 전개될수록 점차 기이한 방향으로 뒤틀린다. 사물이나 인물의 크기는 물리법칙을 무시한 채 왜곡되고(5번, 8번, 58번 꿈 등),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구조물이 눈앞에 나타나며(114번 꿈의 무한한 3차원 퍼즐이나 115번 꿈의 나선형 주차 시스템 등) 갑작스럽게 배경과 장면이 전환되는 일도 매우 빈번히 일어난다(48번, 67번, 116번 꿈 등). 이렇듯 『어렴풋한 부티크』에는 갖가지 형태의 꿈들이 담겨 있지만, 그 아래 깔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