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3분의 1에 갇힌 시야의 장막을 걷어내는 탈중심 세계사 -식민 강국의 시선에서 벗어나 세계 곳곳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간 주인공들의 자리에서 읽는 세계사 -다채로운 역사지도와 사진 자료를 컬러로 보는 세계사 이 책이 만들어진 계기는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내의 대표적인 아프리카·서아시아·중앙아시아·인도·동남아시아·라틴아메리카·오세아니아 역사·문화 연구자들이 기존 세계사 교과서들을 꼼꼼히 분석하여, 서구와 동아시아에 편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구 중심 관점으로 비서구 지역에 대한 잘못된 견해와 정보를 전달하는 교과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해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한 세계사 교과서 바로잡기》라는 책을 펴냈다. 그 후 기존 교과서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 그치지 말고 대안을 제시해달라는, 곧 교과서의 오류와 편견을 극복하는 데 길잡이로 삼을 만한 책을 만들어달라는 역사 교사들의 요청이 있었다. 《더 넓은 세계사》는 바로 그 요청에 대한 17년 만의 응답이다. 다만 일부 필자의 사정으로 오세아니아 편이 빠졌고, 아프리카 편과 라틴아메리카 편의 필자가 바뀌었다. 기존 교과서가 우리에게 가르친 세계관은 서로 맞물려 있는 두 동심원과 같다. 마치 지구가 평평하기라도 한 듯이 서구와 동북아시아가 양쪽 중심에 있고, 다른 지역들은 중심을 둘러싼 가장자리 어딘가에 놓여 있다가, 중심축의 이야기에 필요할 때만 조연처럼 단역처럼 등장한다. 그러나 세계는 두 중심축에서 뻗어나간 동심원이 아니다. 세계는 겹겹이 입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고대 유럽의 문명은 이집트·서아시아와 인적·물적으로 교류하면서 탄생했고,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는 유사 이래 유기적으로 연동하는 관계였으며,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끊임없이 인도로 스며드는 사이 인도는 동서 양편에 풍요를 선사했고, 동남아시아는 인도와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한편 삼각무역으로 라틴아메리카와 중국, 유럽을 연결했다.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동서 양편의 문물을 양쪽으로 전달하며 동북아시아와 유럽의 문화 발전을 자극했다. 현대 서구와 동북아시아의 문명과 풍요는 이들 지역과 사람들을 통과하면서 탄생하고 성장했다. 그러나 이들 지역과 사람들은 그저 문명의 통로나 성장의 발판으로 이용되고 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세계 속 주인공으로 역사를 만들어갔고 지금도 만들고 있다. 이들의 존재가 누락된 세계사는 불완전하고 불균형하다. 마치 로마제국과 중국을 괴롭히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듯한 기마 유목 민족의 터전 중앙아시아, 고대부터 동서 교류의 중심에 있었으나 최근 들어서야 세계의 신성장 동력으로 주목받는 동남아시아, 근현대의 역동성은 무시되고 과거의 찬란한 문명만 박제되어 있는 듯 오해받는 인도, 인류 문명의 시원이자 고대 철학과 과학의 계승자였으나 오늘날 가장 심한 오해와 편견의 대상이 된 서아시아, 인류사 희비극의 총체라 할 수 있는 라틴아메리카, 단 한 번도 잠자고 있지 않았으나 그늘 속 엑스트라 취급을 받기 일쑤였던 아프리카. 이 책은 ‘가진 자, 지배자, 식민 강국’의 시선에서 벗어나 세계 곳곳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절절히 만들어갔던 주인공들의 자리에서 세계사를 돌아보고자 한다. 책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몇 가지 소개한다. 세계 최초의 대학은 아프리카에 세워졌다 역사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고대의 학술 기관을 제외하면 ‘세계 최초의 대학’은 11세기 초 설립된 이탈리아 볼로냐대학과 영국의 옥스포드대학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970년경 이미 알아즈하르대학이 이집트의 카이로에 들어섰다. 말리 중부의 팀북투에 있는 상코레대학도 일찍이 14세기 초부터 발전했다. 유럽은 이슬람 과학자에게서 의학을 배웠다 근대 이전 유럽의 의과대학은 9세기 말 10세기 초 활동한 페르시아인 알라지와 11세기 초 활동한 페르시아계 중앙아시아인 이븐 시나의 저작을 교과서로 사용했다. 중세에 고대 철학자들의 과학 연구를 수집·보존·번역하고 쇄신하며 발전시킨 학문의 요람은 서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와 남유럽에 걸친 이슬람권에 있었다. 칭기즈칸 사후 몽골제국은 분열했나 13세기 초 유라시아 대륙을 장악했던 칭기즈칸이 1226년 사망한 뒤, 몽골제국은 조치 울루스(킵차크칸국), 카안 울루스(원나라), 훌레구 울루스(일칸국), 차가타이 울루스(차가타이칸국)로 나뉘었다. 지금까지는 이를 몽골제국의 분열로 이해했으나, 종가(宗家)인 카안 울루스가 멸망할 때까지 4개 울루스가 통합성을 유지했던 데 근거하여 최근 많은 연구자들이 쿠빌라이 이후의 몽골제국을 일종의 연방제 국가로 본다. 녹슬지 않는 강철은 인도인의 발명품 단단하고 잘 닳지 않아 오늘날 각종 공구와 철로의 소재로 쓰이는 고탄소강을 처음 만들어낸 것은 서기전 6세기의 남인도인들이었다. 남인도의 강철은 아라비아, 이집트, 로마, 중국으로 수출되어 그들 지역의 제철기술 발전을 자극했다. 1500년이 넘도록 비바람과 뜨거운 햇볕을 견디면서도 아직까지 녹슬지 않은 채 당당히 서 있는 것으로 유명한 ‘델리의 쇠기둥’은 인도 제철 기술의 생생한 증거다. 신라의 승려들이 수마트라에 간 까닭은 오늘날 인도네시아를 이루는 주요 섬인 수마트라에 7세기 중엽 건설된 스리위자야왕국은 해상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번영했던 나라다. 스리위자야에서는 대승불교가 번성했다. 7세기의 중국 승려 의정(義淨)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당시 각지에서 스리위자야의 수도인 팔렘방에 와 머무르면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며 인도 유학을 준비하는 승려가 천 명이 넘었다. 신라에서 인도로 간 여러 구법승도 같은 경로를 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1도 없는 수 0을 독자적으로 생각해낸 마야인들 1도 없는 상태를 0이라는 수로 처음 인식한 것은 서기 7세기 무렵의 인도인들이라고 알려진다. 이들의 수 체계와 계산법을 바탕으로, 오늘날 세계 공통으로 쓰이는 10진법 인도-아라비아 수 체계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중앙아메리카의 마야인들도 외부 세계와 교류 없이 스스로 0 개념을 도입하고 20진법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