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이수명의 ‘날짜 없는 일기’ 2권 출간!
날것의 반형식, 반문학적인 쓰기
시를 버리고 지상에 도달하는 언어들
시인 이수명의 ‘날짜 없는 일기’ 두번째 권 『정적과 소음』이 출판사 난다에서 출간되었다. 2023년 1월부터 12월까지 1년 동안 가볍고 조용한 호흡으로 써내려간 일기를 한 권에 묶었다. 2022년의 일기를 담은 『내가 없는 쓰기』에 이어지는 책이나 독립적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하루의 어느 행간에서, 짧은 틈새에서 사소하고 밋밋한 것들과 함께한 흔적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문학화시킬 필요가 없는 평평한 순간들, 어떠한 의미도 들어서지 않는 평이한 순간을 유지하려는 시도였다고. 시인 이수명은 이번 책을 쓰며 시가 아닌 쓰기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모르겠으면서도 그런 쓰기가 가능한 것처럼 움직여보았다고 말한다. 내용 없이, 내용의 회전과 동력 없이, 마치 호흡하듯 문장만을 따라가는 무미한 글을. 그러나 이마저도 문학을 온전히 걷어내진 못하리라는 의구심을 내버려두고서.
날짜 없는 일기 첫 권 『내가 없는 쓰기』에 이어 써내려간 이번 책에서는 작년보다 더 두드러지게 두 갈래 글들이 들어섰다. 하나는 가벼움과 조용함으로 이루어진 일상의 무의미한 조각들이고, 다른 하나는 문학의 의구심 쪽으로 난 길이다. 시인 자신의 시와 글쓰기를 비롯하여 문학사, 시인들과 그들의 행로를 포괄하는 글들, 시와 글쓰기에 대한 약간의 거리감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시와 문학을 다시 바라본 글들. 이수명에게 이 두 가지는 모두 시로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시가 아닌 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글이다. 단지 형식으로부터 놓여남에 불과한 정적과 소음이다. 그것들은 흩어지면서 잠시 숨을 쉬듯이, 중얼거리듯이, 혼잣말하듯이 놓여 있다.
집 앞의 돌계단은 작년처럼 여전히 검지만, 조금 더 검다(14쪽). 시인은 찬바람을 쐬며 자신이 존재라는 모여 있음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음을 감각한다(15쪽). 텅 빈 물. 비었지만 물로 꽉 차 있는 아무것도 넣지 않은 물이 주는 감각을 통해 말은 어느 방향이든 반쪽만을 표현할 수 있고 절반만 볼 수 있거나 절반만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본다. 앞 페이지와 뒤 페이지를 한 번에 볼 수 없는(24쪽) 삶. 시인은 모여 있는 날들, 어제 오늘 내일, 혹은 우리가 상상하는 선형적인 시간성에서 하루라는 감각을 온전히 구해내려 한다. 물병이 쓰러지며 쏟아지는 물이 방향 없이 납작해지는 순간, 물병 속 물이 물병을 잊듯, 시를 버리고 지상에 도달하는 언어들(34쪽)이다. 빛 속에는 손 위를 스치는 부유물이 있다. 눈에 보이는 듯하지만 잡을 수 없는, 우리가 편리하게 먼지라 부르는 것들(54쪽). 무엇이든 아래로,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떨어지는 것들을 우리는 잡지 못한다. 단지 떨어진 것을 치울 뿐(38쪽)이다. 절벽에서 절벽으로, 불확실한 곳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인간은 이 시간에서 다음 시간으로 맹목적으로 추락해간다. 절벽에 부딪힌 물방울은 부서지면서 다음 절벽으로 떨어진다. 최후까지, 더이상 부서질 수 없을 때까지(99쪽). 시인은 아무리 써도 쓴 것 같지 않은 어둠, 뚫을 수 없고 간직할 수 없고 반지 같은 확실한 것을 끼울 수 없는 어둠을 바라보며 어둠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한다(100쪽). 이수명은 박물관 어두운 전시실 은은한 조명 아래 놓인 수백 점의 백자를 본다. 백자가 억제를 통해 드러낸 형체, 그 순백의 색에 물결이나 나뭇잎, 꽃과 열매와 새의 극미한 순간들이 새겨지는 것을. 운명을 넘어선 예술, 자생하는 현재다(77쪽).
빛 속에서 흔들리는 그것들은 빛을 건너고 있다. 제자리에서 빛을 건너고 있다. 최소한의 크기로 존재를 축소시켜 움직여도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동과 부동이 일치하는 상태가 이 부유물들이다. 언제나 그중 어느 한쪽으로 나아가려 하는 나의 미천한 시도를 넘어선 존재들이다. 이 존재들이 빛에 흔들리며 빛을 흔들고 있다.
―2023년 3월 일기 4
이수명의 ‘날짜 없는 일기’ 시리즈
시를 쓰는 사람이 맞닥뜨린 언어의 편린들을 주워올린 일종의 문학 일기. 1년 동안 쓴 일기를 한 권에 묶고 날짜를 쓰지 않고 월별로만 장을 나누었다. 문학화시킬 필요가 없는 평평한 순간들에 대한 기록, 문학의 반대편으로 나아가는 날것의 글쓰기이자 어떠한 의미도 들어서지 않는 평이한 순간을 유지하려는 시도이다. 시인 이수명은 시에 대한 생각 옆에 무심하게 펼쳐진 시공간과 일상, 사물과 현상을 이리저리 스케치해나가며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경계, 시어와 시어 아닌 것의 차이가 흐려지는 순간을 포착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