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 희곡선 스무 번째 작품 『시차』는 1994년에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2014년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라는 20년의 시차를 둔 사회적 참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다. 1994년의 최윤재와 2014년의 최세민은 참사의 피해자는 아니지만 참사로 인해 사회가 감내하는 사회적 고통을 함께 겪는 시민이다. 각자의 시간에서 불의의 사고를 직간접적으로 겪은 이들은 누군가의 조건 없는 도움을 받고 겪는다. 누군가가 이들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푼 선의는 이들로 하여금 누군가에게 조건 없는 또 다른 선의를 베풀도록 나아가게 한다.
사회적 참사는 사고를 예방하고 대응하는 사회적 구조와 체계가 충분히 마련되지 않아 발생한 사고라는 점에서 사회의 책임이 크다. 참사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참사는 또 발생한다. 또다시 마주한 크고도 비참하며 끔찍한 희생 앞에 우리는 감내하기 어려운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무력감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나아감은 어떻게 가능할까. 『시차』는 여기에 시선을 둔다.
사회적 참사는 개인 차원에서 막을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참사가 개인과 무관한 일은 아니다. 사회적 참사와 개인은 여러 경로로 연결되어 있다. 개인 또는 그의 주변 인물이 과거에 발생한 사회적 참사에 연관되어 있을 수 있고, 앞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참사에 연관될 수도 있다. 또 사회적 참사는 사회적인 원인으로 발생하는 만큼 그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은 참사로 인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특정한 사회적 참사로 인해 직접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해서 그 참사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사회적 참사가 발생했을 때 사고의 원인을 찾고 책임을 묻는 것, 그리고 그 참사를 오래 기억하는 것은 비단 사고를 잘 수습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다른 참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 노력은 사회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조리한 희생을 함께 슬퍼하는 데서, 고통을 겪는 타인에게 괜찮냐고 하는 물음에서, 뭐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꼭 쥐는 손에서,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조건 없이 돕는 선의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그 노력들이 참사를 직접 해결하거나 막아내지 못하는 작은 것일지라도, 결과를 바로 확인할 수 없거나 예상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발휘하는 선의가 어디론가 누군가에게 결국에는 가닿음을, 이미 그러하고 있음을 『시차』는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