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젊은 작가였던 에밀 졸라는 섹스와 살인, 하층민 캐릭터 같은 자극적인 소재뿐만 아니라 놀랍도록 냉철하고 과학적인 태도를 통해 당대 독자들의 위선을 한 방에 날려버렸다. 냉정한 문체와 폭력의 결합이 던지는 충격은 후세에 등장할 누아르 소설 못지않으며, 특히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에 끼친 이 작품의 영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_ 가디언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의 완결 ‘루공 마카르 총서’의 예고
<테레즈 라캥>은 프랑스의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가 1867년에 쓴 첫 자연주의 소설이다. 에밀 졸라가 28세에 쓴 세번째 작품으로 그에게 작가로서의 명성을 처음 안겨준 작품이다. 파리의 퐁네프 파사주를 배경으로 한 <테레즈 라캥>은 하층민인 주인공, 불륜과 살인이라는 선정적인 소재 때문에 출간 당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졸라는 1868년 출간된 제2판에 직접 서문을 달았는데, 여기서 그는 “나는 해부학자가 시체에 대하여 행하는 것과 같은 분석적인 작업을 살아 있는 두 육체에 대하여 행한 것뿐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연주의 소설의 창시자로 불리게 된다. 이후 <테레즈 라캥>은 에밀 졸라가 사실주의를 발전시켜 자연주의를 개진한 작품이자, 그의 대표작인 ‘루공 마카르 총서’를 예고한 작품으로 평가되기에 이른다.
또한 최근 영화감독 박찬욱이 <테레즈 라캥>이 자신의 신작 [박쥐]의 원작이라고 밝혀 화제가 되었다. 박찬욱 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극단적인 상황에서 도덕적 딜레마를 겪으며 해답을 찾는 게 내 방식”이라며, [복수는 나의 것]을 만들 당시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을 떠올렸다면 [박쥐]는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개봉을 앞두고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이번 <테레즈 라캥> 개정판은 에밀 졸라의 작품을 새롭게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테레즈 라캥>에는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이 전부 담겨 있다. 처음 읽었을 때, 마치 내가 쓴 소설인 줄 알았다!” _ 영화감독 박찬욱
에밀 졸라 문학의 서막, 자연주의 문학의 서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유행한 과학적 결정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에밀 졸라는 인간의 본성이 유전과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한 임상실험에서 얻은 결과를 바탕으로 불행과 나약함의 원인을 밝혀낼 수 있으리라 믿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1871년에 시작되어 20여 년에 걸쳐 발표된 ‘루공 마카르 총서’다. 루공 가(家)와 마카르 가가 결합된 한 가족사를 통해 제2제정시대를 그려낸 이 총서는 유전론과 환경결정론을 바탕으로 한 졸라의 자연주의적 사고방식이 본격적으로 표출된 작품이다. 전20권으로 이루어진 이 총서는 <나나> <목로주점> <제르미날> 등 졸라의 대표작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상류사회만을 다루던 당대의 작품 경향과 달리 서민을 생활을 서민의 언어로 그려내어 인기를 얻었다.
<테레즈 라캥>은 이런 ‘루공 마카르 총서’의 집필을 시작하기 직전에 발표한 작품으로, 에밀 졸라 문학의 서막을 열어 보인 작품이다. 첫 출간 당시 “<테레즈 라캥>의 저자는 포르노그래피를 펼쳐놓고 스스로 만족해하는 불쌍한 히스테리 환자”라는 등 비판이 거세게 일자, 1868년 출간된 제2판에 졸라 자신이 직접 항의하는 서문을 달기도 했다. 여기서 그는 플로베르의 사실주의를 발전시킨 자신의 자연주의 문학이론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나는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기를 원했다. 나는 자유의지를 박탈당하고 육체의 필연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가는,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받는 인물들을 선택했다. 테레즈와 로랑은 인간이라는 동물들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들의 동물성 속에서 열정의 어렴풋한 작용을, 본능의 충동을, 신경질적인 위기에 뒤따르는 돌발적인 두뇌의 혼란을 조금씩 좇아가려고 노력했다. 내가 그들의 회한을 촉구해야 했던 부분은, 단순한 생체 조직 내의 무질서, 파괴를 지향하는 신경체계의 반란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영혼은 완벽하게 부재한다. 나는 그것을 시인한다. _ 서문에서
육체의 욕망이 빚어낸 살인 _ 욕정은 사라지고 증오만이 끓어오른다
어렸을 때 고모인 라캥 부인에게 맡겨진 테레즈는 야성적이고 건강한 체질이지만 병약한 사촌 카미유와 함께 자란다. 아들이 성인이 되자 라캥 부인은, 건강한 테레즈가 자신이 죽은 후에 카미유를 돌봐줄 거라 생각하며 둘을 결혼시킨다. 결혼 후 세 사람은 퐁네프 파사주로 이사하여 라캥 부인은 작은 잡화상을 열고 카미유는 철도청 말단 직원으로 취직한다. 카미유는 직장생활에, 라캥 부인은 안정된 생활에 만족하지만 테레즈는 자기 안의 야성과 욕망을 채우지 못해 무료해한다. 어느 날 카미유는 어린 시절 친구 로랑을 집으로 데려오고, 테레즈와 로랑은 서로의 육체적 욕망을 채우는 관계가 된다.
결국 로랑과 테레즈는 뱃놀이중에 카미유를 센 강에 빠뜨려 죽인다. 카미유만 사라지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던 그들은 밤마다 카미유의 환영에 시달린다. 일 년이 지난 후 결혼까지 했으나 그 둘 사이엔 여전히 카미유의 유령이 존재한다. 아무것도 모르던 라캥 부인이 전신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게 되자 이들은 자신들의 살인을 그녀 앞에서 폭로해버린다. 모든 사실을 알고 분노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라캥 부인은 견딜 수 없는 증오를 느낀다.
카미유의 유령에 시달리던 테레즈와 로랑은 서로를 미워하며 더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상대방을 죽이려 한다. 마지막 순간 고통으로 갈가리 찢긴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알아채고 함께 자살한다. 라캥 부인은 휠체어에서, 죽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차갑게 지켜본다.
근대 자본주의 공간의 원형, 파사주 _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센 강 둑에서 오자면 게네고 가(街)의 끝에 이르러 퐁네프 파사주에 닿게 된다. 마자린 가에서 센 가로 통하는 이 좁고 침침한 회랑은 길이가 삼십 야드, 폭이 이 야드에 불과하다. 바닥을 덮고 있는 갈라진 노란색의 포석들은 언제나 심한 습기를 내뿜고 있다. 통로를 수직으로 내려다보는 유리 천장에는 검은 때가 끼어 있다. 회랑 왼편에는 침침하고 낮고 다 쪼그라진 가게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지하의 서늘한 공기가 새어 나오는 그곳에는 헌책방, 장난감 가게, 지물상들이 있다. 흉하게 갈색칠 된 장롱 선반 위에는 무언지 모를 상품들이 이십 년 동안 잊혀진 채 널려 있다. _ <테레즈 라캥> 중에서
<테레즈 라캥>에서 테레즈 가족의 잡화상이자 주거 공간인 퐁네프의 파사주는 등장인물들만큼이나 중요하게 묘사된다. 대도시 파리에 대한 환상을 품고 베르농을 떠난 그들은 낡고 초라한 현실과 맞닥뜨리고, 도시 한 귀퉁이에서 숨죽인 채 살아간다. 습기차고 검은 때가 끼어 있는 파사주마냥 생기를 빼앗긴 채 살아가던 테레즈는 로랑을 만나면서 내면의 욕망을 자각하고, 그것은 결국 살인으로 이어진다. 이후 카미유를 죽인 테레즈와 로랑이 서로 증오와 살인의 충동에 시달리게 되면서, 퐁네프 파사주의 집은 밀회 장소에서 그들을 무시무시한 공포로 몰아넣는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이렇게 퐁네프에 위치한 파사주는 등장인물들의 욕망과 공포를 대변하는 공간으로 작품 내내 등장한다.
파사주는 19세기 파리에서 처음 생겨난 회랑식 상가 ‘파사주passage’(영어로 아케이드)를 가리킨다. ‘세기의 수도’라 일컬어졌던 19세기 파리는 최초의 만국박람회, 아케이드, 백화점 등 자본주의적 공간이 생겨나고 오스만 대로가 건설되는 등 확장과 팽창을 거듭하였다. 쇼핑몰의 조상이자 근대 자본주의적 공간의 원형인 파사주에 대한 고찰은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본격적으로 시도된 바 있다. 벤야민이 13년간 준비했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미완으로 남은 이 저작은 근대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제2제정시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