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이 책에 대하여 1. 이 책은 저자가 석사논문에서 출발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거쳐 현재까지 20여 년 동안 헌신, 연구해온 비스마르크 연구의 결정판이다. 이러한 점들은 책을 읽다보면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다. 2. 전문 역사가가 집필한 비스마르크 연구의 집대성이다. 광범위한 사료 섭렵과 깊은 역사 지식, 그리고 전문 연구자의 치밀함 등이 책 곳곳에 스며 있다. 3. 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비스마르크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19세기 유럽사와 독일 근대사 등도 자세히 아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비스마르크 평전의 전범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즉 평전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국내 필자가 이만 한 책을 집필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내용 1989년 11월 9일, 동서 냉전의 상징이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맞이한 독일인들은 그 이듬해 통일을 맞이한 조국의 정체성을 올바로 세우기 위한 일환으로 과거 청산과 함께 ‘완전한 역사 새로 쓰기’의 작업에 돌입했다. 말하자면, 두 개로 분단된 국가에서 살아온 그들이 각각의 과거사와 그 이전 ‘대과거’의 공동 역사는 물론 통일된 국가의 완성된 모습에 대한 이해와 연구를 시대적 과제로 삼게 된 것이다. 그런 역사 작업 속에서 첫 통일독일의 지도자인 비스마르크가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비스마르크의 제2제국이 1990년 독일 통일의 출발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체 역사’에서 제2제국이 신성로마제국의 제1제국과 히틀러의 제3제국 사이의 ‘중간기’로서, 특히 나치 출현과 그로 인한 분단국가의 역사와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스마르크가 탄생한 지 175년이 되는 해이자 정치무대에서 물러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1990년과 서거한 지 100년이 되는 1998년의 기념행사들을 기점으로 통일독일의 현장 속에서 그는 쉼없이 ‘부활’했다. 비스마르크는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가문 대대로 융커나 장교 출신의 보수주의 성향을 띤 귀족가문의 친가와 17세기부터 시작되는 지식인 중심의 자유주의 시민계급 출신의 외가를 배경으로 태어났다. 비록 신분의 차이나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보이긴 했으나, 그의 조상들이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위해 몸 바친 위정자들인 동시에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한, 프로이센을 떠받치고 있던 두 개의 축을 대변했음은 분명했다. 어떻게 보면 전혀 다른 두 세계를 오가면서 경험을 쌓고 이를 효과적으로 발전시킬 기회와 가능성을 부여받았으나, 비스마르크 스스로는 그런 환경적 이점을 거부했다. 어머니의 냉정한 교육방식과 어긋난 사랑으로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강제로 가족의 품을 떠나 도시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그는 어머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거부하기까지 했다. 평민 출신의 어머니로 인한 자신의 이중적인 신분을 외면하는가 하면 자신의 자질이나 성품조차 어머니의 섬세한 문학적 소양과 예민한 정신적 기질을 그대로 닮았음을 부정할 만큼 융커 출신의 보수적 귀족가문의 아버지에 일방적으로 집착했고, 아버지의 뿌리에서 정체성과 안정감을 찾으려 했다.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그는 스스로 찾아낸 그런 방식을 고수할 뿐 포기하는 데 익숙지 않았고, 심지어 극단적인 기질의 소유자로 변해갔다. 그런 외골수의 모습은 이른바 고질적인 ‘비스마르크 병’이라는 성격 결함으로 곧잘 표출되곤 했다.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국가를 통치하고 유럽의 정치질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도자로서 위치를 생각해볼 때 간과할 수 없는 그런 증세는 어린 시절의 상흔과 부정적인 기억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어머니의 강요에 따라 괴팅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비스마르크는 불성실한 대학시절에 이어 방탕한 공직생활과 영국의 상류층 여성들과 염문설로 청년시절의 값비싼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일자리도 놓치고 외교관의 꿈마저 접은 채 빚더미에 앉아 낙향한 이후로 지루하고 한적한 전원생활의 도피처로서 원치도 않던 군복무를 자청하는가 하면 농업경영인의 삶에도 뛰어들었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만족하지 못했다. 농경생활에 묻혀 조용히 지내는 자신의 처지를 괴로워하며 병적인 나태함에 빠져들어 인생의 ‘낙오자’나 다름없었다. 자신 속에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내면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중 비스마르크는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진정한 첫사랑이자 절친한 친구 브랑켄부르크의 약혼녀인 마리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공허함과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한 그에게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함께 삶에 대한 새로운 의욕까지 불어넣어준 마리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 그리고 예기치 못한 그녀의 죽음을 뒤로 한 채 비스마르크는 비로소 생의 반려자인 아내 요한나와 가족을 이룰 수 있었다. 마리의 친구로서 누구보다 마리의 의미를 잘 알던 요한나로서는 마리의 존재가 그의 아내인 자신을 평생 동안 가려버리게 되리라는 것 역시 잘 알았다. 그러나 요한나는 청춘시절 비스마르크의 오랜 방황과 좌절을 모두 끝낼 수 있도록 이끌어준 길잡이이자 오로지 공직에 전념할 수 있도록 헌신과 내조를 아끼지 않은 희생양으로서 비스마르크의 일등공신이었다. 죽음을 맞이한 마지막 순간에 “요한나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는 간절한 한마디의 기도만을 남길 만큼 비스마르크에게 요한나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1847년 4월 통합의회 보결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비스마르크는 1849년 프로이센 하원과 1850년 에어푸르트 연합의회의 의원직을 수행해나갔다. 1848년 3월 혁명 당시 모든 자유·민주주의적인 행동과 거리를 두고, 소독일주의적 통일 주장이나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연합 계획안 등을 모두 반대할 만큼 친오스트리아적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나 1851년부터 8년 동안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의 프로이센 대사를 역임하면서 그는 프로이센의 동등권을 획득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유지되어온 빈 체제 하의 독일연방에 역행하는 이원주의를 당당하게 외쳤다. 마침내 1862년 비스마르크는 철도부설에 이어 군제개혁으로 인한 예산안 갈등이 헌법 분쟁으로 악화된 상황에서 빌헬름 1세의 부름으로 프로이센의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국왕에 대한 자신의 충성을 전달하는 취지에서 내뱉은 철과 피에 의한 ‘힘의 정치’ 발언이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직접적인 투쟁선언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그의 정치적 노정은 험난한 길로 들어섰다. 때마침 독일 북부에 위치한 슐레스비히-홀슈인 두 공국을 둘러싸고 덴마크와 전쟁이 가시화되자, 그는 내부의 위기상황을 외부로 돌리는 다선의 정책을 이용했다.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여 민족 간의 협조체제로써 덴마크와 전쟁에서 승리함은 물론 헌법분쟁으로 인한 반대의 분위기를 일소하는 동시에 그동안 서로 적대적인 노선을 펼친 오스트리아와 상호 연합전선을 구축해놓았다. 그러나 승전 이후 두 공국에 대한 두 강대국 간의 소유권 장악이 향후 독일의 정치상황을 곤란한 지경으로 내몰아갔다. 비스마르크로서는 충분히 예상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동등한 이원주의 목표를 잊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덴마크 문제는 독일 북부 주변의 부차적인 문제만은 아닌, 오히려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 정치를 실현하는 새로운 지름길인 동시에 향후 독일 정치의 물꼬를 터주는 배수로이기도 했다. 1866년 ‘이류 국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아류국가, 프로이센’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비스마르크는 주변국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이원주의를 거부한 오스트리아와 자신의 정치생명을 내건 최후의 수단으로 전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형제 전쟁’에서 승리한 그는 장차 프랑스나 러시아의 새로운 움직임에 대비하여 대패한 오스트리아를 영원한 적으로 만들지 않고 미래의 동지로 남겨두기 위해 전후 협상을 서둘러 매끄럽게 처리하는 외교적 역량을 펼쳤다. 실제로 오스트리아보다 큰 후유증을 안게 된 프랑스는 ‘사도바를 위한 보복전’을 기도한 나머지 1870/71년의 전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