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디라도 새어나간다면 죽을 것이다!”
궁녀의 하루를 대표하는 것은 지밀궁녀의 하루이다. 지밀나인들의 근무는 하루 24시간을 상하번으로 나누어 교대하는 2교대가 원칙이었다. 지밀至密이란 왕과 왕실 가족이 거처하는 처소를 말하며 궁중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말 한 마디 새어나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궁녀들은 어린 생각시 시절부터 철저히 입단속을 교육받았다. 섣달그믐 밤이 되면 입을 수건으로 가리고 내관들로부터 횃불로 위협받았는데 입조심을 하라는 뜻으로 이를 ‘쥐부리 글려’ 행사라고 불렀다. 수라를 준비하는 소주방 궁녀도 지밀 소속이었다. 왕에게 수라를 들일 때는 궁녀가 먼저 음식을 먹고 독이 들었는지를 검사했는데 이를 ‘기미를 본다’고 했다. 왕비의 기미상궁은 보통 시집올 때 친정에서 함께 온 궁녀가 맡았는데 때로는 은수저로 독을 검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지엄한 지밀에서 궁녀가 남자와 간통하여 임신한 사건은 충격이었다. 현종 8년(1667) 벌어진 사건으로 대비전 소속 나인 귀열과 서리로 근무하는 형부 이흥윤이 당사자였다. 진노한 현종은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귀열을 참수형에 처했다.
1부 <하루로 읽는 조선 궁녀의 일생>에서는 인조 저주 사건에 휘말려 억울한 죽음을 당한 기옥과 서향, 그리고 연산군의 복수에 희생되어 쇄골표풍碎骨飄風형에 처해진 조두대의 삶이 펼쳐진다. 그 인생 이야기 안에 저녁도 굶으면서 글씨를 써야 했던 궁체 연습, 혹독한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던 담배 시험, 품계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 월급을 받던 봉급날 풍경 등 궁녀의 삶을 대표하는 하루들이 담겨진다. 그녀들의 삶은 왕실의 부침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서사상궁으로서 왕명을 출납하는 자리에 있었던 조두대는 왕실을 잘 받든 공이 있다 하여 동생과 조카는 양인이 되고 사촌오빠는 겸사복이 된다. 그러나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인수대비의 심복으로서 폐비 윤씨에 대해 의도적으로 거짓 보고를 올린 것이 발각되어 뼈가 가루가 되는 처절한 복수를 당한다.
궁녀들은 은밀한 스캔들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문종의 첫 번째 부인 휘빈 김씨의 방술 스캔들에는 궁녀 호초가 개입되어 있었으며, 두 번째 부인 순빈 봉씨의 동성애 스캔들에서는 궁녀 소쌍이 상대역으로 등장한다. 동성애를 하는 궁녀들 사이에서는 엉덩이에 벗 붕朋 자를 문신으로 새기기도 했다. 때로는 별감이나 내시, 관리나 종친, 심지어 승려와도 정을 통하여 궁 안에서 아이를 낳는 일까지 있었다.
궁궐 안에서 아이를 기르는 궁녀의 낯선 모습!
2부 <하루 일과에서 스캔들까지 궁녀의 모든 것>에서는 침방, 수방, 세수간, 소주방, 세답방, 방자 등 각 부서별 궁녀들의 하루를 보여준다. 왕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궁녀는 세수간 소속이었다. 세수간은 아침저녁으로 왕과 왕비의 세숫물과 목욕물을 대령하는 것이 소임이었다. 왕비가 궁 안에서 후원 같은 곳을 산책할 때는 가마를 메는 일과 앞뒤에서 시위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왕이 대변이나 소변이 보고 싶다고 하면 세수간 궁녀가 매우틀 속에 여물을 잘게 썬 매추라는 것을 뿌려서 가져왔다. 매우틀은 요즘의 좌변기와 비슷한데, ㄷ자의 터진 쪽을 앞으로 한 것 같은 모양의 나무틀 밑에 반짝반짝 빛나는 동그릇이 놓여 있고, 나무틀 위는 빨간 우단으로 싸서 앉게 되어 있었다. 왕은 매우틀에 앉아서 용변을 보면 나인이 명주로 왕의 뒤처리를 한 후에 매추를 뿌리고 덮어서 가지고 나갔다.
궁녀의 출궁과 죽음에 대한 대목도 흥미롭다. 궁녀가 궁을 나갈 수 있는 길은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 날이 가물었을 때 궁녀를 방출하는 경우였다. 결혼하지 못한 여인의 한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에 그 원통한 마음을 풀어줘야만 가뭄이 해소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둘째는 중병에 걸려 더 이상 업무 수행을 하기가 어려운 경우였다. 궁녀들은 병이 들면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밖에 있던 질병가로 나와 나을 때까지 치료를 받으며 요양했다. 병이 나으면 다시 입궁되지만 나을 가망이 없다고 여겨지면 궁녀의 직을 파하고 사가로 돌려보냈다. 셋째, 늙어서 더 이상 궁녀로서 업무 수행이 불가능한 경우였다. 왕족 외에는 궁에서 죽을 수 없다는 법도 때문이었다. 이 외에도 모시던 상전이 죽거나 죄를 짓나 왕의 특명이 있는 경우에도 궁을 나갈 수 있었다. 생을 마친 궁녀들은 선조들의 선산에 묻히거나 불교의 예에 따라 화장되었다.
궁 밖에 집과 땅을 사고 노비를 들이는 등 재산을 불렸던 궁녀의 재테크와 은밀한 성 문화를 중심으로 한 근무 백태도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궁궐 안에서 술을 빚어 팔고 아이를 기르기까지 했던 궁녀의 모습은 그동안 알려진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조선 중반기를 거치면서 궁녀들의 기강이 해이해져 정조는 ‘궁녀의 연회를 금하는 교서’를 내리기도 했다.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상궁들이 휴가를 내고 궁 밖으로 나가서 꽃놀이나 뱃놀이를 즐겼다는 것인데,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기생을 대동하거나 궁중의 노비를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소방관이었던 멸화군과 오늘날 냉동 영안실에 해당하는 장례 때의 설빙, 두려운 측간 가기, 나례 날 풍경 등 다채로운 궁중 문화들도 친절하게 소개된다.
아웃사이더들이 남긴 삶의 편린을 담다
3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궁녀 이야기>에서는 조선 최고의 갑부 궁녀가 된 박상궁에서 국경을 넘어 사랑한 리진의 비극까지 때로는 극적이고 때로는 신산했던 궁녀들의 라이프 스토리를 담아낸다. 세종과 인현왕후에 대한 충성심으로 후궁의 자리까지 올랐던 신빈 김씨와 숙빈 최씨, 광해군을 동정하여 눈물을 흘렸지만 인조비가 진심을 높이 사 보모상궁으로 삼았던 한보향,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도세자에 대한 정절을 지켰던 수칙 이씨, 조선 궁궐의 이국 소쩍새 명나라 궁녀 굴씨와 일본에서 피어난 조선의 성녀 오타 주리아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또한 프랑스 공사 플랑시와 리진이 일본 쿄토에서 찍은 약혼 사진 등 도판들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승자의 기록이다. 어제의 승자들이 사료를 쓰고 오늘의 승자들이 그것을 해석한다. 때문에 우리는 사서史書에 기록된 일을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승자의 기록을 중심으로 역사에 접근할 때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는 아웃사이더들의 역사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기존의 한국사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왕조사에 치중하면서 비주류들의 삶을 연구하는 데는 소홀한 경향이 있었다. 《궁녀의 하루》는 역사 속 아웃사이더들이 남긴 삶의 편린들을 가지런히 챙겨 대중의 취향에 맞는 스토리 속에 살뜰하게 담아낸다. 유장한 역사의 흐름 안에서 명멸해갔던 갑남을녀들의 삶에 더운 숨결을 불어넣는 것, 그리고 역사는 한두 사람의 권력가가 아니라 수많은 대중들의 힘으로 움직인다는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 《궁녀의 하루》가 갖고 있는 비전이다. 비슷한 내용과 콘셉트를 반복하며 침체의 늪을 부유하는 역사서들 사이에서 새로운 책을 갈망해온 독자들에게 《궁녀의 하루》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