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전술의 한국사

이상훈 · 전쟁
3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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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을 펴내며 서설 _ 전략전술, 한국사를 읽는 새로운 방법 1장 벽골제, 저수지인가 방조제인가―벽골제의 성격 논쟁 벽골제 미스터리|4세기 기후, 한랭 건조화되다|4세기 서해의 해수면은 현재보다 높았다?|해수의 침입을 벽골제로 막다|백제, 벽골제 축조로 김제 지역 통제를 강화하다 2장 보급의 성공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김유신의 군량 수송작전 김유신의 군량 수송부대, 이렇게 구성되었다|김유신, 평양행 수송길에 오르다|군량 수송 거점을 확보하다|김유신, 군량 수송 성공 후 철수길에 오르다 징검다리 1 _ 신라의 무기 개량과 삼국통일 3장 작전지휘권을 통해 고려군의 위상 변화를 살피다―여몽연합군의 삼별초 진압 삼별초 세력, 어느 정도였나|삼별초, 진압되다|여몽연합군, 어떻게 편성되었나|여몽연합군의 주력, 몽골군에서 고려군으로|원종, 왕권을 강화하다|고려, 군사권을 회복하다 4장 왜 고려군은 왜구와 내륙에서 전투를 벌였을까―고려군의 왜구 토벌작전 사근내역전투, 패전에도 불구하고 포상받다|사근내역전투는 고려군의 왜구 토벌 전략의 일환|고려군의 몰이사냥 전술|황산전투, 시작되다|황산전투에서 고려군은 어느 정도 규모였나|황산으로 가는 길|이성계, 우회기동으로 왜구를 격퇴하다 징검다리 2 _ 전근대 군율의 시행 5장 빠른 속도의 전격전, 회군을 성공으로 이끌다―이성계의 위화도회군 요동 원정길에 오르다|이성계, 회군하다|개경의 방어태세는 어떠했나|위화도회군,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지다|개경전투 시작되다|개경, 함락되다 6장 신립은 탄금대전투에서 왜 배수진을 고집했는가―신립의 탄금대전투 신립, 탄금대에 방어선을 치다|방어거점, 어떻게 달랐나|탄금대는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다|탄금대 방어, 풍향과 무기 면에서도 유리|탄금대 방어는 최선의 선택이었다|탄금대전투 시작되다|신립, 패배하다|패배, 그러나 탄금대 선택은 합리적 징검다리 3 _ 정여립의 군사 전략 7장 조명연합군, 울산왜성 함락에 실패하다―조명연합군의 울산왜성 포위작전 울산왜성을 포위하다|조명연합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나|울산왜성 공격, 수월한 작전이 아니었다|울산왜성의 일본군, 상당한 군수물자를 비축해두다|일본군, 조명연합군을 기만하다|울산왜성전투, 왜곡되다 8장 이괄, 관군의 기만술에 당하다―이괄의 난과 안현전투 국경 중심 방어에서 수도 중심 방어로|도성, 성곽 중심의 방어|이괄, 남하하다|관군의 부대 편성|관군, 부대를 나누어 이괄을 치다|병력의 열세를 지형과 기상으로 극복하다|안현전투의 복원 징검다리 4 _ 조선 후기 군사 실태 9장 염하수로 도하, 조선에 병인양요 승리를 선사하다―조선군의 염하수로 도하작전 정족산성전투,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거둔 최초의 승리|프랑스군은 왜 철수했는가|염하수로 도하를 감행하다|염하수로 도하, 어떻게 이루어졌나|도하작전,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해병대 운용과 유사하다 징검다리 5 _ 러일전쟁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전략전술로 한국사를 새롭게 읽다 외면받는 전쟁과 전쟁사 연구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자 휴전국가다. 그럼에도 서구에 비해 군사학이나 전쟁사에 대한 연구는 그리 활발한 편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상당히 외면받아왔다. 일본 식민지배와 한국전쟁 그리고 장기간의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전쟁과 전쟁사에 대한 연구는 적극적으로 연구해야 할 분야가 아니라 기피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물론 각 군 사관학교, 국방대학교, 군 관련 연구소 등을 중심으로 전쟁사에 대한 관심이 꾸준하긴 하다. 군사사 분야 최초의 종합 역사서로 평가받는 《한국군사사》(육군군사연구소 편, 총 16권)의 편찬, 대학별 군사학과의 증가, 밀리터리 마니아들의 활발한 활동 등은 고무적인 변화다. 그러나 전문 군사용어 사용과 접근의 제한으로 인해 일반 독자들에게 연구 성과가 소개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전략전술과 관련해서는 외국 저자가 쓴 번역서가 독자들의 선택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사 속에 등장했던 다양한 전략전술, 주제에 따라 시대순으로 살피다 전략전술은 크게는 국가전략에서 작게는 소부대의 전술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전쟁사 연구에 매진해온 저자 이상훈은 《전략전술의 한국사―국가전략에서 도하전까지》에서 한국사 속에 등장했던 다양한 전략전술 중 9가지의 전략전술에 대한 사례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1장은 국가전략, 2장은 보급전, 3장은 작전권, 4장은 포위전, 5장은 속도전, 6장은 방어전, 7장은 공성전, 8장은 기만전, 9장은 도하전이다. 전략전술 사례를 주제에 따라 시대순으로 서술함으로써 독자들의 관련 이해를 높이고자 했다. 김제의 벽골제는 저수지라고 알려져 있는데 왜 평지에 3킬로미터가 넘게 둑을 쌓았을까? 김유신은 어떻게 고구려 영토를 관통하면서 대량의 군량을 무사히 수송할 수 있었을까? 여몽연합군의 주력은 몽골군인데 왜 제주도 삼별초 진압 때는 고려군이 주도적으로 나섰을까? 고려 말 왜구와의 대규모 전투인 황산전투는 왜 해안이 아닌 내륙 지리산 일대에서 벌어진 것일까?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왜 진군 당시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남하했을까? 신립은 왜 조령을 포기하고 모두가 반대하는 탄금대를 결전 장소로 선정했을까? 대규모의 조명연합군은 왜 울산왜성에 고립된 가토 기요마사를 잡지 못했을까? 한양 도성을 순식간에 장악한 이괄의 반란은 왜 그리 허무하게 진압되고 말았을까? 병인양요 시기 조선군은 어떠한 방법을 통해 염하수로를 건너 강화도로 상륙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필자 나름의 생각이다. 한국은 동양의 작은 나라로서 끊임없는 외침을 받아왔으며 문약하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역사 전반에서 전략전술을 살펴보는 시도는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책이 끊임없는 외침과 내란을 극복해온 우리 선조들의 전략전술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아홉 가지의 전략전술로 보는 한국사 벽골제, 국가전략 측면에서 그 성격을 살피다 4세기경 백제는 3킬로미터가 넘는 대규모 제방을 김제평야 일대에 건설한다. 바로 벽골제다. 과연 백제가 이른 시기에 국가 존립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거대한 제방을 쌓은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저수지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방조防潮의 목적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국가전략 면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저자는 벽골제의 성격 고찰을 위해 4세기의 기후와 해수면의 변화에 대해 살핀다. 4세기 한반도는 한랭 건조했으며, 서해의 해수면은 현재보다 높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에 따라 당시 한국의 서해안은 잦은 해일과 해침을 겪었다. 특히 벽골제가 축조된 곳은 경사도가 완만하여 염수피해가 심각했을 것이다. 이에 벽골제를 축조, 해수의 침입을 막고 담수를 확보하여 김제평야 일대에 관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요컨대 벽골제는 관개 제언일 뿐만 아니라, 대규모 저수지로서 홍수 조절의 역할을 수행하고, 만조위 시에는 바닷물의 유입을 차단하여 제 내의 농경지 침수도 방비할 수 있는 다목적 기능을 가진 시설이었다. 저자는 벽골제의 성격에 대해 이 같이 결론을 내린 후 벽골제를 국가전략 면에서 살핀다. 3킬로미터에 달하는 공사에는 대규모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하고, 이들을 동원할 수 있는 집권력이 구비되어야 한다. 백제가 김제 지역을 영역으로 편입한 시기는 비류왕대로 추정되고 있으며, 4세기 전반 벽골제 축조를 위한 대규모 노동력 동원도 가능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4세기 백제는 벽골제라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개발과 통제를 한층 강화해나갔던 것이다. 김유신의 군량 수송, 보급전의 백미 보급은 전쟁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삼국통일전쟁이 한창이던 7세기에 평양을 포위한 당군이 식량난에 빠진 일이 있다. 이를 구원하기 위해 신라 김유신의 군량 수송부대가 파견되었다. 고구려 영토를 통과하여 당군에게 군량을 수송한 후 다시 귀환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가 김유신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김유신은 병력의 손실 없이 무사히 군량을 당군에게 전달하고 귀환했다. 어떻게 김유신은 대규모 군량 수송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저자는 김유신의 군량 수송부대의 구성, 여러 수송 경로 중 김유신이 선택한 수송로, 군량 수송을 위해 김유신이 선택한 거점, 군량 수송 방법, 철수 경로 등을 여러 측면에서 고찰한 후 평양으로의 대규모 군량 수송작전 성공이 김유신의 과감한 결단과 치밀한 계획 그리고 임기응변으로 인해 가능했다고 결론 내린다. 김유신의 군량 수송작전은 신라가 처음으로 고구려를 종심 깊이 횡단한 사건이었으며, 평양성을 포위한 당군의 철수를 보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군량 수송작전의 성공적 경험은 이후 나당연합군이 평양 진군과 점령에 성공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삼별초 진압과 고려군의 위상 변화, 작전권을 통해 고찰하다 1270년 삼별초는 몽골에 굴복해 개경으로 환도하려는 고려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 삼별초의 항쟁은 1270년부터 1273년까지 4년간 지속되었다. 고려와 몽골은 삼별초 진압과 일본 원정을 위해 여몽연합군을 편성했다. 전시작전권은 몽골이 가지고 있었고, 고려군은 몽골군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진도와 제주도의 삼별초 진압 과정에서 여몽연합군의 작전지휘권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여몽연합군 내에서 시기에 따라 고려군의 위상이 어떻게 변화했는가? 당시 고려 국왕의 군사통수권은 여원관계의 특수성으로 인해 상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고려의 군사제도는 원의 강력한 군사적 견제와 통제에 의해 왜곡․변질되었으며, 고려의 독자적인 군사적 유지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원종은 이처럼 완전히 붕괴된 중앙과 지방의 군사체계를 일정 부분이나마 회복했다. 원종은 복위 이후 태묘를 재건하고 동서학당을 설치하여 유교적 지배질서를 강화했다. 서서히 군사통수권을 회복하면서 새롭게 고려군을 모집하고 편성했다. 종친과 총신의 재산을 보호하여 자신의 측근세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원종은 왕권을 점차 강화했고, 이를 기반으로 제주도 삼별초 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진도 삼별초 진압 과정에서 몽골군을 보조하는 역할에 그쳤던 고려군이 제주도 삼별초 진압 시에는 주도적인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고려의 적극적인 군사 행동은 그에 상응하는 발언권을 몽골로부터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 말 왜구 토벌, 포위전의 진수 고려는 북쪽으로는 거란.여진.몽골 등과, 남쪽으로는 왜구와 끊임없이 전투를 벌여왔다. 특히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발하여 연해 지방의 피해가 극심했다. 1380년 고려에 대대적으로 침입한 왜구들은 해안 지역이 아닌 지리산 일대 황산에서 고려군과 결정적인 전투를 벌였다. 그동안 황산전투는 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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