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있어 아름다운 88세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일본의 여류작가 소노 아야코의 『아름답게 늙는 지혜(원제, 계로록戒老錄)』를 번역 소개한 이래 KBS 라디오의 노인프로그램과 여성지 <라벨르>에 칼럼을 연재해온 이기옥의 신작산문집 『나는 내 나이가 좋다』가 도서출판 푸르메에서 출간되었다. 자칫 무기력하고 암울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노년의 일상을 오래된 취미와 함께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생활하고 있는 저자의 글을 통해 요즘 같은 장수의 시대에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노년에 대한 준비와 설계의 본보기로 삼을 만한 책이다.
총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장에서는 나이든 노인들이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단상을 정리했다. 10년 전만 해도 십수 명이 모이던 여고 동창 모임에 이제는 달랑 네 명이 모여 나눈 대화, 노년이 길어지면서 세 번씩이나 준비해야 했던 영정사진, 혼자 지내다 홀연히 떠날 때를 대비해 만든 나이 성명 주소 유고시 연락처를 적은 아주 특별한 명찰, 노인에게 돈의 의미, 오래된 친구인 눈 코 손 발 다리 등에 대한 감사, 노인이 경계해야 할 점, 사후 세계에 대한 명상까지 묵직한 주제들이 담담하고 솔직하게 그려져 있다.
2장에서는 ‘노인의 꿈’을 주제로 한 글들을 모았다. 저자의 오래된 취미인 조각보 뭇기와 수채화 그리기 글쓰기가 주는 즐거움과 기쁨 외에도 예전처럼 솜씨나게 김장을 해서 주변 친지들과 나누고 싶은 소망이나 이사 올 때 가져온 항아리에 담은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다시 여자로 태어난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상상해보는 마음들이 따뜻하고 정겹다.
3장에서는 공동주택의 화단에 화초를 가꾸고 옥상에 채마밭을 일구는 ‘노인의 일상’을 주제로 한 글들을 모았다. 전에는 바보상자라고 무시했던 텔레비전이 어느새 좋은 친구가 되어 있고 늘 바쁘게 쫓기듯이 살아온 생활을 후회하며 수능시험의 걱정도 자식들의 취직에서도 한 발 비껴선 노인만의 한가한 여유를 즐기며 살 것을 다짐하는 글들이다.
4장에는 고향과 어머니와 옛집 등에 대한 소중한 추억 이야기가 5장에는 영화와 연극을 본 소감과 르완다 종족 학살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소회 등이 유려하게 담겨있다.
책을 좋아하던 갈래머리 소녀, 90을 바라보다
1924년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 숙명여대 전수과를 졸업한, 올해 88세인 저자는 언제부터 취미가 되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바늘과 실을 정다운 동무 삼아 바느질을 해왔다. 바늘에 실이 잘 꿰지지 않아서 눈을 비비고 미간에 주름을 모으면서도 손에서 바늘을 놓지 못하는 저자는 십자수와 퀼트를 거쳐 지금은 조각보 뭇는 작업을 30년 동안 해오고 있다. 그냥 무료하게 흘려보낼 수도 있었던 시간들이 바늘과 실 덕분에 예쁜 보자기로, 혹은 상보로 혹은 은은한 세모시 방장으로 남았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바늘 한 땀에 삶을, 또 한 땀에 세상을 뜰 마지막 날을 생각하며 저자는 바늘과 실에게 인사를 보낸다.
“고마워, 친구야. 너희들이 벗해주어서 나는 외롭지 않았고 바늘을 움직이며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거든.” ―본문에서
부친이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체 형식의 출판사인 <한성도서주식회사>의 공동설립자이셨던 만큼 늘 책이 넘치던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보며 소설의 세계에 빠져 지냈다. 이런 딸을 우려해 아버지께서 금서령을 내렸을 만큼 책을 좋아해 글쓰는 일 역시 자연스러운 취미가 되었다. 세 어머니에게서 낳은 11남매 중의 장남에게로 시집와 고된 시집살이 틈틈이 메모 형식의 글을 쓰다가 남 몰래 써온 소설도 여러 편이 있다. 이미 두 권의 에세이집과 한 권의 번역서를 세상에 소개한 바 있다.
1994년부터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해 요즘도 그림을 그리러 화구를 들고 야외로 나가다 보니 늘 자연을 가까이할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 나는 내 발로 걸어서 장을 보러 가고 산책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하다. 아직 간을 맞출 수 있어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줄 수 있어 행복하고, 맛있다고 먹어주는 효자 자식들이 있어 행복하다. 오늘 나는 눈이 보여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바느질을 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본문에서
저자는 지금까지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그리고 바쁘게 살아왔지만, 이제는 더욱 천천히 여유있는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즐기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모든 면에서 조금 여유로워진 지금의 나이를 더욱 사랑한다고 말한다. 나이든 노인들에게는 꿈을 잃지 말라는 희망의 선물로, 노년의 문턱에 선 분들에게는 이제부터 원했던 꿈을 위해 한발 내디뎌 보라는 격려의 마음으로, 더 젊은 세대들에게는 노년의 삶이 결코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소통의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