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사 사고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손구용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밤 산책>은 사운드가 아예 들어가 있지 않은 영화다. 이 실험적인 다큐멘터리는 어떤 동네의 밤 풍경을 계속 보여주며 진행된다. 어둠 속 달빛이나 창문이 비칠 무렵이면, 화면에 귀여운 드로잉이 덧입혀지고 이어서 손글씨로 적힌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가 보인다. 이를테면 “뜰앞에 한 거울이 펼쳐져 있어/ 하늘빛과 구름빛이 비치이누나/ 새벽녘에 바람 살랑 불어서 오자/ 맑은 향기 옥 샘물에 연하였구나”(<호은정의 열두 경치를 읊다>, 김성일, <학봉전집>) 같은 방식의 글이 어렴풋하게 화면에 보인다. 정조의 서정적인 시 ‘달을 읊다'(“수면에는 막 맑은 야기를 함축했는데/ 가득 찬 둥근 새 달은 너무도 높고 밝아라”, <홍재전서>) 등 50여 편의 시를 감상하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한밤중에 가볍게 산책을 하고 온 듯 머리가 맑아지고 고즈넉한 운치에 젖게 된다. 올해 로테르담국제영화제 하버 부문에서 상영됐다.(문석) [2023년 24회 전주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