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사에서 구조된 부뒤
Boudu sauvé des eaux
1932 · 코미디 · 프랑스
1시간 25분 ·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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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포쇼의 통속 희극을 각색한 작품으로, 인상주의적 경향과 자연주의적 표현기법이 혼합된 수작으로 부뒤 역을 맡은 미셀 시몽의 뛰어난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 파리의 방랑자 부뒤는 어느 날 세느 강에 몸을 던진다. 그는 레스티노이라는 한 자유주의자에게 구조되는데 그는 부뒤를 사회에 적응시키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시네마테크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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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솜땅
4.0
정말 부뒤는 자살하려 물에 뛰어든 걸까? 구함을 받은 부뒤의 억척스럽고 제멋대로인 행동이 심히 불안하게 했고, 그는!! 다시 계륵같은 존재로 조금 격상되는 듯 했다!! 역시 부뒤의 큰그림!! 그렇게 느껴졌다 ㅋㅋㅋㅋ #22.7.31 (851)
포포투
5.0
〈부뒤〉를 너무나 손쉬운 부르주아 풍자극이자 레스탕그와 씨에 대한 공격으로 보는 것은 르누아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부뒤〉는 단순히 무질서를 옹호하는 것도, 질서를 공격하는 영화도 아니다. 레스탕그와씨는 모순도 많지만 다른 사람에게 연민을 비추기도 하고, 무엇보다 영화에서 부뒤는 그가 되고 싶어하는 또 다른 자아처럼 느껴지기에 그렇다. 후에 그가 부뒤와 안-마리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볼 때, 그 둘의 관계를 두고 (프롤로그에 등장한) 자신의 상상과도 같았던 프리아포스와 님프의 그것에 빗댄다는 점에서 비춰지는 바이다. 되려, 이 영화는 흥분의 공간인 도시와 자연, 그리고 그 둘을 잇는 파리와 (파리지앵이 부르는) 노래를 보여준다 (하스미 시게히코가 쓴 표현 '성기로서의 도시'는 얼마나 적절한가!). 영화가 끝나는 지점의 두 쇼트는 정작 부뒤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우리가 보는 것은 양 옆으로 엠마와 안-마리를 안고 있는 레스탕그와씨의 모습과 영화의 주제곡을 부르는 방랑자들의 모습이다. 프랑스 문화에 익숙하면 두 여자를 낀 레스탕그와씨의 이미지에 익숙할 것이다. 흔히 'ménage à trois (3명의 가정)'이라 불리는 관계의 표상과도 같은 이미지다. 이를 잇는 마지막의 이미지는 파리의 거리를 행진하듯이 '흥분'의 노래를 부르는 방랑자들의 모습이다 (이 '흥분의 노래'는 이상할 정도로 영화에서 거듭해 등장하며, 서로 알지 못하는 인물들이 마치 몰래 약속했다는 것처럼 같이 이 노래를 부르곤 한다). 이때 언급한 노래와 함께 다양한 음악/노래의 배치는 토키 영화로서의 〈부뒤〉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암캐〉와 반대 지점에 놓인 듯한 이 영화의 사운드 사용이 그가 토키 영화를 만든지 몇 년 되지 않아 이뤄지고 있음은 르누아르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서 디제시스의 안(또는 밖)에 놓인 음악이 거듭하며 반복된 후 다른 위치에 놓이는 사운드 배치를 즐겨 쓰며 이 사운드의 이동은 부뒤의 경로와 매우 유사하다. 이의 가장 대표적 예는 극에서 등장하는 플룻 연주다. 이때 플룻 연주는 디제시스 내부의 소리와 외부의 소리의 경계로 작용하는, 일종의 연극 무대의 대목을 가르는 것처럼 제시된다. 연극의 막(act)을 나누듯이 등장하면 일반적으로 디제시스 외부의 소리일텐데, 〈부뒤〉의 플룻 연주는 의도적으로 그 연주자를 카메라에 담아 이를 디제시스 내부의 소리로서 주관적인 사운드의 위치에 놓는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 플룻 소리가 처음부터 디제시스 내부의 소리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플룻 소리는 프롤로그에서 디제시스 밖의 소리로 가장 먼저 등장했다. 이때 우린 당연히 연극 무대의 소리라 여기고 객관적 사운드에 놓이지만, 영화가 '현실'로 입장하며 주관적 사운드로 바뀌는 것이다. 플룻 소리의 등장은 영화의 러닝타임에 걸쳐 5번 등장한다; 1) 디제시스 밖: 영화의 타이틀 카드와 함께 화면에 등장 2) 디제시스 안: 플룻을 부르는 사나이가 나오며 파리의 숏이 이어짐 3) 디제시스 안: 부뒤가 구조된 날의 밤에 같은 남자가 창가에서 플룻을 부름 4) 디제시스 안: 다음 날 아침 씬이 시작하기 전 동일한 남자가 창가에서 플룻을 부름 5) 디제시스 밖: 파리의 거리에 서 있는 부뒤만이 숏에 등장하며, 창가의 남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음. 처음처럼 다시 객관적인 사운드의 위치에 놓이는 때(플룻 연주자가 등장하지 않고 마치 영화의 공간 밖에서 소리가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는 레스탕그와 씨의 집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 즉 등장인물 모두의 불륜과 욕정이 발각나는 장면의 전조로 흐를 때이다. 〈부뒤〉에서 (특히 플룻의) 음악은 부뒤처럼 흥분과 욕정의 전조로, 주관적 사운드가 객관적 사운드로 위치를 옮길때 욕망은 탄로난다. '기존 도덕의 개념'을 지키기 위해서 레스탕그와씨는 하녀 안-마리와 부뒤의 결혼을 주례한다. 이제 부르주아 안으로 들어온 부뒤는 물에 띄워진 꽃들을 만지려 하고, 이 와중 배를 전복시킨다. 후에 그를 찾지 못한 부르주아들은 서로에게 묻는다; '부뒤는 도망친걸까, 죽은걸까?'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애초에 부뒤는 본인이 원해서 물을 떠난 게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물에 들어간 부뒤는 타자에 의해 물에서 빠져나왔고, 다시 본인의 의지대로 세느 강의 물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말로 형용하기 힘든 순간들이 등장한다. 부르주아의 옷을 버리고 허수아비의 옷을 갈아입는 숏, 강에 흐르는 부뒤의 모자의 리듬 같은 순간들은 이 영화를 감싸는 아우라가 된다. 그리고 부뒤의 '물'에 대한 이런 행동은 〈부뒤〉를 정의내리기 힘들게 만들며, 그가 뛰어내린 다리의 이름이 예술의 다리(Pont des Arts)라는 점을 저절로 연상시키게 만든다. 부뒤가 홀로 헤엄쳐 부르주아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목격한 이상 우리에게 그의 자살 시도는 일종의 '예술' 같은 위치에 놓인다. 그가 물에서 나오는 순간, 우리는 그와 안-마리의 결혼식에서 들은 음악을 다시 듣는다. 주관적 사운드가 객관적 사운드의 위치에 범람하는 것을 우린 영화에서 다시 보며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갔다는 듯의 감각을 깨닫는다. '물'에 의해 만들어진 난장판으로 매혹시키는 이 방랑자의 몸짓만큼 르누아르적인게 있을까.
Dh
3.5
그럴듯한 겉치레에서 벗어난 부뒤 #성질 #강물
양기연
5.0
게임의 규칙을 쥐고 흔들며 온갖 경계를 허물던 그가 다시 물어 뛰어들었다 나오는 순간, 그의 게임판 흔들기는 관객에게까지 확장되어 온다. . (2013.3.30.) (스포일러) . 영화가 시작되면, 서점을 운영하는 부르주아 에두아르가 가정부이자 정부인 안느 마리에게 온갖 인용으로 점철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있다. 신화 속 인물까지 인용해 가며 사랑을 속삭이던 그들의 모습이 디졸브를 통해 어떤 흉상의 클로즈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화면이 바뀌면 우리는 그 흉상이 그 집 안의 장식품임을 알 수 있다. . 그 흉상이 사실상 살아 있는 실체가 아닌 어떤 실체의 죽어 있는 모사라고 생각할 때, 영화가 인용으로 잔뜩 포장한 밀어를 속삭이는 에두아르와 안느 마리의 얼굴을 디졸브로 자연스레 흉상 클로즈업으로 옮겨가는 이 장치는, 어쩌면 에두아르의 말들이 진정한 감정의 발로가 아닌 껍데기 뿐인 말들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준다. 나아가 그 흉상 클로즈업이 집의 구조로 이어지게 함으로써 영화는 이 '껍데기만을 중시하는 풍조'가 이 집 안을 지배하는 논리임을 미리 예고하고 있는 셈이다. . 에두아르와 그의 아내 엠마, 정부 안느 마리의 이야기가 '그 집 안에서' 진행되는 와중에, 영화는 거렁뱅이 부뒤의 이야기를 '집 밖의 공간에서' 병렬적으로 진행시키기 시작한다. 부뒤는 사람들에게 경멸의 대상, 싸구려 동정의 대상으로 취급당하며 이곳저곳을 전전하고, 그 와중에 그의 유일한 친구인 개가 사라진다. 부뒤가 그 개를 찾도록 도와주는 이는 하나도 없고, 결국 부뒤는 물에 빠져 죽으려 한다. . 이 때 처음으로 집 안의 세계와 집 밖의 세계가 이어 붙는다. 망원경으로 집 밖의 여자를 관찰하던 에두아르가 물에 빠진 부뒤를 목격하고 그를 구한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집 밖의 빈민층'인 부뒤를 '집 안 부르주아의 세계'로 데려온다. 그 순간부터 '집 안 세계'의 사람들과 '집 밖 세계'에서 온 부뒤 사이의 충돌이 시작된다. . 집 안의 부르주아들은 부뒤를 '야만'으로 타자화하며 그에게 새 옷을 입히고 예절을 교육하려 하며, 자신들은 생명의 은인이니 감사할 줄 알라 말한다. 그러나 부뒤는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왜 자신을 살려주었냐고 되물으며 집 밖 세계에서 체득해 온 습성대로 행동하는 와중에 공교롭게도 껍데기 뿐인 집 안 세계를 해체해 가기 시작한다. 부뒤에게 '야만적'이라 말하면서도 실상 욕정과 물질에 물들어 그 이면에 또다른 '야만'을 품고 있는 그들에게, 부뒤는 자신이 야만적이라면 그들 역시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듯 하다. 그는 남에게 잘 보이고 으스대기 위한 인용 및 소장의 대상 혹은 판매와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한 책들에 침을 뱉고, 구두를 닦고 외출하라는 말에 오히려 구두 닦을 도구를 찾는다는 명목 하에 집 안을 잔뜩 더럽혀 버린다. 또한 그가 집안 사람들의 제안에 이발을 하고 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부르주아인 에두아르를 모방하듯 에두아르의 아내 엠마와 불륜을 저지르는 일이다(처음에는 부뒤를 거부하던 엠마가 그와 섹스를 나눈 뒤에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돌변해 그 밑바닥을 여지없이 까발려 보여준다.). 나아가 그는 우연히 사자대면 상황을 만들어 집 안 사람들로 하여금 그 집 안의 추악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 그 사자대면에 이르는 과정에서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 있다. 에두아르가 서점을 비워두자 부뒤가 대신 그 서점을 지키게 되는데, 이때 손님 한 명이 찾아와 보들레르의 '악의 꽃' 초판본을 찾는다. 부뒤는 '여기는 꽃집이 아니라 서점'이라며 그를 내쫓는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식민지 박람회'를 홍보하며 지나가는데, 부뒤는 그 식민지 박람회라는 말에 이끌려 달려나간다. 부뒤는 왜 '식민지 박람회'에 이끌린 것일까? . 제국주의 국가들은 약소국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옥죄어 자생이 힘든 상황으로 몰아가는 한 편, 종교, 교육, 문화 등을 이용해 그 국민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해 가며 접근해 서서히 식민지로 만들어간다. 또한 그 과정에서 그들은 식민 대상에 '낙후', '야만' 등의 이미지를 덧씌우고 자신들의 식민 행위가 약소국 근대화를 위한 선의의 행위라 주장한다. 영화 속에서 부뒤 역시 사람들의 외면, 경멸, 값싼 동정에 시달리던 와중에 유일한 친구인 개까지 사라져 버리는, 혼자 살아가기 힘든 극단적인 상황에 이른 상태였다. 부르주아들이 빈민층을 대하는 태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음에도, 그 부르주아들은 그를 다시 구해 놓고 마치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대하듯 그에게 감사를 강요하며 그를 '야만인'의 이미지를 덧씌우고 그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교화하려 드는 것이다. 그 와중에 부뒤는 식민지 국민들이 그렇듯 어떤 면에선 자신을 교화하려 드는 부르주아들의 논리를 재생산하는가 하면 어떤 면에선 그에 반항하기도 한다. 즉, 집 안 세계의 부르주아들과 부뒤의 관계가 그 자체로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의 은유이며, 영화는 이를 '식민지 박람회'의 언급으로 드러낸 것이다. . 부뒤가 식민지 박람회를 보러 서점을 떠나자 에두아르가 다시 돌아온다. 돌아온 에두아르가 안느 마리와 방 안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 때 부뒤가 돌아오고, 엠마는 에두아리와 안느 마리가 함께 있는 그 방문 바로 밖에서 부뒤를 유혹한다. 이때 엠마를 부뒤가 피하는 중에 우연히 사자대면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부뒤와 에두아르가 서점 문 근처에 머무르는 프레임 상에서 자리를 바꾸고, 그 뒤 방 안팎으로 에두아르-안나 마리 / 부뒤-엠마의 상황이 겹친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빈민층 출신인 부뒤와 부르주아인 에두아르가 결국 근본적으로 같음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 한 편, 영화는 음악을 도구 삼아 영화 속에서 '집 안', '집 밖'으로 구분되고 그 집 안에서도 다시 가정 내 위계 질서에 따라 분화된 인물들이 그 계급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똑같은 인간임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같은 혹은 유사한 곡조의 음악을 끊임없이 등장시키는데, 그 등장 양상은 다양하다. 우선 옆집 청년의 악기 연주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인물들이 창을 통해 그 청년을 바라보는 장면들을 이어붙임으로써 그 시선을 통해 여러 인물들이 동일시되는 효과를 낳는다. 더불어 비슷한 곡을 부뒤의 노래, 에두아르의 피아노 연주, 안느 마리의 노래 등으로 등장시킴으로써 다시 인물들을 한 데 묶어내기도 한다. 즉, 영화는 음악을 매개 삼아 극중 인물들에 있어 그 겉으로 보이는 위계에도 불구하고 그 실질적인 경계를 모두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영화는 이에서 그치지 않고 부뒤와 엠마의 정사 중 악기를 연주하는 소년의 그림을 클로즈업하는 와중에 배경음악으로 그 곡을 등장시키더니 이윽고 집 밖에서 악단이 그 곡을 연주하는 장면을 이어붙이는 등, 극중 세계의 외부와 내부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데 음악을 이용하기도 한다. . 영화의 결말부에 이르면, 부뒤가 십만 프랑 복권에 당첨되자 그때까지 부뒤를 거부하던 안느 마리가 그 속물적인 속을 드러내고, 결국 둘은 결혼하기에 이른다. 그토록 원하던 안느 마리와의 결혼이건만, 부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한 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느 마리와 사랑을 속삭이던 에두아르는 이제 안느 마리와 부뒤의 결혼을 축복하며 주례사를 하기까지 한다. 영화 첫 장면에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일 때 에두아르는 안느 마리가 프리아포스 신이 흠모하는 클로에라 말한 바 있는데, 주례사 장면에선 에두아르가 직접 부뒤를 프리아포스 신이라 칭하기도 한다(검색해 보니 프리아포스는 번식과 다산의 상징으로 거대한 성기를 가진 모습으로 묘사된다고... 부뒤와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복권으로 자본을 갖추자마자 그때까지 교화의 대상이었던 부뒤가 일순간에 결혼에 성공하고 자신을 교화하려던 바로 그 부르주아에게서 신에 비유되며 축복받는다. . 장 르누아르의 또 다른 영화인 '게임의 규칙'에서 부르주아 사회의 외부자로서 등장했던 주인공은 그 위선을 까발리는 하룻밤의 게임에서 일종의 촉매 역할을 하지만, 그 게임에서 드러낸 감정을 다시 위선으로 가리는 대신 현실로까지 끌고 가려 했던 탓에, 다시 말해 '게임의 규칙'을 제대로 체화하지 못한 탓에 죽음에 이르고 만다. 그러나 '익사에서 구조된 부뒤' 속 부뒤는 부르주아 사회의 외부자로서 등장해 그 위선을 까발리는 게임의 촉매 역할을 한다는 점에선 같지만('게임의 규칙' 하니 생각난 건데, '게임의 규칙'에서 새 소리를 모방하는 기계 장치에 매료된 저택 주인의 모습은 '익사에서 구조된 부뒤'에서 봄이면 살아나는 새에 대한 노래를 부르며 새 박제를 닦는 안느 마리의 모습과 겹친다.), '게임의 규칙'의 주인공과 달리 그 규칙을 체화하지 못해 죽음으로 도태되는 대신 돈에 힘입어 게임의 규칙을 틀어쥐고 흔들 수 있는 위치에 선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 그러나 그 주체적 위치에 섰을 때, 부뒤는 물에 떠 있는 꽃잎을 집으려다 다시 물에 빠지는 길을 택한다. 죽은 척 둥둥 떠서 흘러가던 그는 부르주아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헤엄쳐 뭍으로 나오더니, 자신이 입은 비싼 옷들을 내던지고 허수아비가 입은 거적대기 같은 옷들을 입고는 근처에 누워 있던 사람에게서 빵을 얻어먹는다. 영화 초반에 개 한 마리가 그의 곁에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염소 한 마리가 그에 곁에 있다. 그리고 개가 떠났던 것처럼 염소도 그의 곁을 곧 떠나지만, 부뒤는 이제 그를 찾으려 전전긍긍하는 대신 홀로 누워 이전의 그 곡을 다시 흥얼거린다. 영화 초반에 부뒤가 물에 빠졌다가 구출되었을 때 마치 한 번 죽었다가 집 밖의 영역의 빈민층에서 집 안의 영역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것처럼, 이때도 그는 마치 부르주아 세계 속 주체적 위치로서의 자신을 죽이고 다시 빈민층으로 재탄생한 듯 보인다. . 즉, 부뒤는 한 번의 부활을 통해 부르주아의 세계를 관통할 기회를 얻은 바 있지만, 막대한 돈을 통해 그 세계에서 주체적 위치를 확보하고 다시금 선택의 기회를 얻자 아이러니하게도 그 위치를 고수하기보단 다 버리고 처음의 자신으로 돌아가길 택한 것이다. 집단 밖의 타인을 '야만'이란 이름 아래 타자화하고 교화하려 드는가 하면, 그 세계 내부는 돈 하나로 모든 것이 가능하며 순 껍데기 뿐이기에 공허한 그 '집 안의 공간'에 아마도 그는 큰 환멸을 느낀 듯하다. 다시 집 밖의 세상으로 나온 그는 비로소 다시 제 자리를 찾은 듯 행복해 보인다. . 부뒤가 드러누워 노래를 부르는 바로 그 장면에서 한 번 컷이 이루어지고, 화면은 이제 긴 패닝을 통해 가교를 쭈욱 훑으며 보여주곤 다시 컷하더니, 다른 쪽 언덕에 단체로 모여 앉아 있는 부르주아들을 비춰 준다. 그들 역시 함께 물에 빠졌던 터라 지금은 모두 속옷만을 입은 채 몸을 녹이고 있다. 결국 그 패닝을 통해,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의 그 값나가 보이는 옷들을 모두 제거한 그 상황을 통해 영화는 다시 한 번 부뒤와 부르주아들을 동일선상에서 엮어내며 극중 인물들 간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다시 한 번 컷, 이번에는 빼뚜름하게 위치를 잡은 프레임을 여러 명의 노동자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영화를 통해 익숙해진 바로 그 멜로디에 다른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부르며 화면을 지나간다. 지금껏 영화에 등장한 바 없는 인물들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야 갑자기 떼거지로 등장해 영화를 관통하는 바로 그 곡을 부른다. 그 음악이 영화 속 인물들 간의 경계를 허물고 영화 안팎의 경계를 허무는 역할을 한다고 볼 때,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만 등장하는 그 노동자들은 차라리 영화 안의 인물들이라기보단 영화 밖의 인물들, 관객들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만들어졌던 1930년대에는 제국주의 시대를 그대로 함께 통과해 오며 자국의 식민 지배 정당화 논리를 그대로 수용했을 당대의 프랑스 관객들은 이처럼 관객에까지 손을 뻗어 오는 경계 허물기 시도에 꽤 많이 속이 쓰렸으리라. 그러나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작품의 그러한 시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경멸했을 혹은 비웃었을 얼굴들이 결국엔 우리의 얼굴이라는 불편한 진실. 장 르누아르는 자신의 연출에 있어서의 놀라운 역량으로 관객들이 작품에 자연스레 녹아들도록 하였고, 그 몰입 한복판에서 비수를 꽂는다.
정리함
3.5
아찔한 현대사회에서 질식하지 않으려면 수영 정도는 필수 교양 아니겠는가...!
김도현
4.0
단평 | 당대 프랑스 관객들을 향한 장 르누아르의 독한 풍자극. 그러나 영화의 가치 전복적인 지점들은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타를 던진다. 이는 부르주아나 식민지 담론에 대한 서구 중심의 어리석음이 아직도 편재한다는 방증이며, 한편으로는 결코 뒤집히지 않은 제국주의의 유산을 바라본다. 그러니 부뒤라도 이를 실컷 비웃어주길 바라는게 세계 시민들의 잠재된 욕망일 것이다. | 극장전 | 078 | 한국영상자료원 | 4/25 + 비평 | “백인의 짐을 져라. / (…) / 그리하여 너희 꿈이 가까워질 때 / 타인을 위한 목표도 이뤄질 지니, / 너희의 모든 희망을 없애버릴 / 나태와 이방인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라.” 러디어드 키플링, <백인의 짐 (The White Man’s Burden) - 미국과 필리핀 제도> 빵도 없이 이걸 어떻게 먹으라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크닉 중인 커플이 부뒤에게 소시지를 한개 주자 그가 하는 말이다. 가볍게 스치는 장면이라 웃고 넘겨도 되지만, 생각해보면 <익사에서 구조된 부뒤>의 핵심이 담겨있는 문장이다. 사실 그의 말이 맞다. 추측컨데 커플은 샌드위치를 준비해온 모양인데, 줄거면 통째로 줘야 제대로 된 대접이다. 그러나 거렁뱅이처럼 보이는 부뒤에게 그들은 일부만 똑 떼어 준다. 마치 개한테 하는 취급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부뒤는 고작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부르주아인 에두아르의 집에서 살았으며, 복권이 당첨되어 결혼식까지 올린 상태였다. 즉, 부르주아의 생활 양식에 익숙한 그는 샌드위치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고, 더 나아가 소시지만 건내는 건 반쪽짜리 호의라는 점을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커플이 그에게 걸맞는 대접을 하지 않는 것은 그의 신분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부뒤와 같은 거지들은 소시지만 받아도 감지덕지라고 짐작하지 않았을까. 따라서 그 인식이 몸에도 베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나타난 셈이다. <익사에서 구조된 부뒤>가 만들어진 1930년대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겉으로 보이는 품위로 높고 낮음을 평가했던 당시 사람들의 무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것은 국가 외적으로는 식민지 주민들을 야만인들로 대했던 제국주의적 사고관이며, 국가 내적으로는 소득 격차로 발생한 빈민층을 깔보았던 부르주아의 오만이다. 장 르누아르가 보기에 이건 아주 웃기는 광경이다. 그가 한 일은 이를 스크린으로 옮긴 후 그 시대의 관객들과 같이 웃은 것 뿐이다. 마음 편히 웃는 관객은 순진한 것이고, 씁쓸하게 웃는 관객은 위선적인 것이다. 한 편의 도덕풍자극과 같은 그의 영화는 마치 제 얼굴에 침을 뱉고 웃는 것이나 다름없는 효과를 준다. <익사에서 구조된 부뒤>는 당대 프랑스 관객들을 모독하기 위해 만든 영화다. 그러나 시대를 떠나서 이 영화의 윤리적 함정에서 자유로운 관객은 없다. 그건 부뒤를 둘러싼 영화적 상황들이 가진 이중성 때문에 그렇다. 구조적으로 이는 부뒤의 행동 - 부르주아의 반응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데, 관객들은 보통 부뒤보다는 부르주아의 입장에 서서 이 상황들을 바라본다. 극장에 와서 영화를 볼 수 있다면 대체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알게 모르게 말이 통할 것 같은 에두아르나 엠마 또는 안 마리의 편을 든다. 실제로 이 인물들의 사고나 언행은 모두 정상적인 범주에서 이뤄지며, 심지어는 도덕적이라고 평가해줄 만한 구석도 많다. 대표적인 예는 다름 아니라 에두아르가 익사에서 부뒤를 구조하는 장면이다. 망원경으로 거리를 관찰하던 에두아르는 센느 강에 빠진 부뒤를 보고 바로 집에서 뛰쳐나간다. 그는 옷을 벗어던지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강물로 뛰어들어 부뒤를 구해낸다. 그러자 주변에 몰려든 인파는 환호성을 지르고, 그가 참된 부르주아의 가치를 행한 자라고 칭송한다. 심지어 부뒤를 구출한 뒤에도 에두아르는 그에게 음식을 주거나 옷을 입히고 집에 머물게 하는 등 여러 호의를 베푼다. 아무리 이를 시니컬하게 보려해도, 에두아르는 정말 진심으로 부뒤를 구한 것이다. 딱 봐도 부뒤의 존재는 그에게 이득이 되기는 커녕, 부끄럽거나 성가시기만 할 뿐이다. 그런 그를 에두아르는 순수한 선의로 대한다. 물론 나중에는 훈장을 받는 등 부차적인 보상을 받긴 하지만, 에두아르는 이런 것에는 도무지 흥미가 없다. 그러니까 완벽한 의미로써 그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행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그를 나무랄 수 없을 것이다. 한 사람만 예외다. 바로 부뒤다. 영화는 이 부분에 대해서 딱히 숨기는 것도 없다. 의식을 되찾은 부뒤가 다짜고짜 에두아르에게 가서 따지기 때문이다. 난 죽으려고 했는데 왜 댁이 날 살리고 난리요. 초반부 그가 개를 잃어버리고는 상심한 상태로 파리의 거리를 헤매는 부뒤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그의 말이 여기서도 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실수가 아니라 정말로 자살하기 위해 센느 강에 투신한 것이다. 그러나 그저 생명의 은인인 에두아르에게 감사하라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부뒤의 항의는 묻히고 만다. 에두아르의 영웅적 행위는 칭송받으나, 부뒤의 개인사는 쉽게 무시된다. 사람들은 선의로 행한 것이라면 그 결과와 상관없이 긍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선의를 냉소하는 이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 소외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그 선의의 대상자일 경우라도 말이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이를 떠받게 된다. 특히 자살은 당시 카톨릭 신앙의 서구 문화에서는 강력히 규탄받는 행위이므로, 부뒤는 본의 아니게 불리한 입장에 선다. 외부인의 시각으로 부뒤는 신을 저버린 야만인, 그리고 에두아르는 그런 그를 구원한 성자가 되기 때문이다. 선의의 거래에는 바로 이러한 도덕적 위계질서가 작용한다. 더군다나 이는 부뒤와 에두아르처럼 명백한 신분 차이를 보이는 당사자들 사이에서는 더 쉬운 일이다. 복잡하게 들어갈 필요도 없다. 부뒤의 사정이야 어쨌든, 타자들이 보기에 이 두 사람의 입장은 선의의 논리 속에서 간단히 정리된다. 그러나 사실 두 사람의 이해관계는 매우 동등하다. 부뒤는 도와달라고 한 적이 없으며, 따라서 에두아르에게 빚진 것도 없다. 에두아르 역시 선한 마음에서 그를 도와주었고 이를 통해 뭔가를 바라지도 않는다. 실제로 부뒤 다음으로 이 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에두아르이다. 그래서인지 둘은 죽이 잘 맞는다. 부르주아로써의 체면을 지켜야 하는 에두아르에게 부뒤는 일탈을 상징한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부뒤를 보면서 온갖 사회의 규범과 도덕적 책무에서 벗어나고픈 그의 은밀한 욕구를 해소한다. 에두아르가 품격있는 그의 부르주아 집안 속으로 부뒤의 야만성을 들이는 것도 그런 대리만족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가족 구성원들의 회유에 따라 부뒤의 정제되지 않은 습성들을 교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만, 진심인 적이 별로 없다. 에두아르는 부뒤의 기행들을 즐겁게 바라보며, 어떤 때는 그와 동화되기도 한다. 이는 부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부르주아의 생활 양식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으나, 이것이 제공하는 모든 편의를 취한다. 빵을 주려는 엠마의 제안에 정어리를 대접하라고 주문하고, 에두아르의 비싼 옷들을 입고 다니며, 이발소에서 면도를 하고 오자마자 바로 엠마에게 추파를 던진다. 그에게도 귀족들의 삶은 흥미로운 것이라서 그의 자유가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이를 즐길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이 두 인물이 가진 현격한 계급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하는 영향력의 강도는 대등하게 묘사된다. 만약 우리가 <익사에서 구조된 부뒤>를 식민지 담론을 둘러싼 우화로 본다면, 부뒤와 에두아르의 이러한 역할 세팅은 제법 교묘하다. 제국주의를 강대국들이 일방적으로 약소국들을 침탈하고 착취한 역사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실상은 조금 더 복잡하다.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강대국 시민들은 순진했으며,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것을 곧 우월함으로 착각했다는 측면에서 그 무지의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반대로 약소국 시민들은 철저히 자국의 이익에 기반하여 행동했으며, 비대칭 전력을 극복하기 위해 더 교활하고 치밀한 수법들을 동원했다는 기록들이 많다. 그러므로 서구의 식민사관과는 달리, 이건 어느 한쪽이 특별한 우위를 지닌 게임이 아니다. 강대국 시민들은 식민지 주민들을 야만인들로 규정지은 후, 종교나 문화, 또는 교육을 통해 이들을 계몽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며 보기 좋게 포장했다. 그러나 애시당초에 이걸 믿는 약소국 시민들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관점은 성립하지 않으며, 지금 와서야 이를 수치스럽게 인정할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르누아르는 폭소를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더 유효한 관점은 이런 것이다. 한창 제국주의가 진행되고 있던 19세기 말, 프랑스의 식민지 타히티에서는 매독이 유행했다. 이는 젊은 원주민 여성들에게서 빈번히 발견되었는데 발병 원인은 본국에서 건너온 프랑스 남성들이 제공한 것으로 지목된다. 대표적인 예로 후기 인상파의 거장인 폴 고갱을 들 수 있다. 물론 그의 예술작품은 부정할 수 없는 문명의 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고갱은 허울좋은 백인의 신화에 올라탄 채로 스스로의 욕망을 채웠을 뿐일지도 모른다. 제국주의를 통해 전파된 가치들이 고작 그런 거라면,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셈이다. 이를 증명하듯, 영화는 부뒤와 에두아르를 욕망의 교차점에 세운다. 부뒤와 만나기 이전, 에두아르는 이미 집 안의 하녀인 안 마리와 부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그는 그녀를 프라이포스 신이 흠모하는 클로에라고 표현하는 등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사랑을 속삭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 에두아르는 아내인 에마와도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인다. 남몰래 개인적 욕구를 다 채우고 있지만, 겉으로는 부르주아 행세도 제법 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속으로 부뒤가 들어온다. 그는 안 마리의 다락방으로 향하는 계단 위에 자면서 본의 아니게 그들의 관계를 가로막는다. 이로 인해 에두아르의 외도도 점차 뜸해지는데, 침대가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야만인 부뒤가 에두아르의 정조를 지킨다는 점은 지극히 역설적이다. 좀 더 과장하자면, 에두아르가 문명인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건 부뒤의 활약이 크다. 겉으로 보이는 그의 야만성은 에두아르의 선함과 자비로움을 부각시키며, 심지어 내면 깊숙이 감쳐놓았던 추악한 욕망도 억제하는 효과를 주니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지켜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부르주아의 가치가 하찮은 야만인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광경은 그저 실소 나오는 조롱거리일 뿐이다. 물론 르누아르는 부뒤도 성인군자로 만들 생각이 없다. 그는 무슨 대단한 도덕심을 갖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때마다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부뒤가 그들의 불륜을 막은건 순전히 우연이고, 역으로 그는 에두아르의 행태를 보며 무의식적으로 이를 학습한다. 영화 후반부 부뒤는 엠마를 유혹하면서 그 역시 복잡한 불륜 관계의 일원으로 가담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모방의 행위를 통해 이 부르주아 집안을 거울로 비추며 허상을 깨뜨린다. 마침내 부뒤와 엠마가 애정행각을 나누려고 하는 순간, 벽이 무너지며 방 안에서 똑같은 짓을 하려는 에두아르와 안 마리의 불륜 현장이 발각된다. 이들은 부뒤에게 교양과 매너를 가르치려 했으나, 그가 배워간 것은 부르주아들의 나쁜 습관들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부뒤가 지키고 있던 버팀목이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 부르주아 집안은 도덕적 해이의 난장판을 벌인다. 이러한 사자대면의 상황은 부르주아와 하층민, 또는 강대국과 약소국의 시민들을 동일선상에 놓는다. 추레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멀끔한 옷에 면도까지 한 부뒤는 그들과 정말 분간이 가질 않는다. 겉모습으로만 선을 긋는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렇다면 행동으로 이들을 구별해야할텐데, 어쩜 하는 짓도 똑같다. 그러니 속된 말로 계급장 떼고 보면 다 야만스럽기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부뒤는 복권까지 당첨되어 경제적으로도 그들과 동일한 수준이 된다. 따라서 안 마리가 속물 근성을 드러내면서 부뒤에게 붙자 상황은 거짓말처럼 정리된다. 부뒤는 안 마리와 결혼식을 올리고, 에두아르가 주례를 자처한다. 그러나 무슨 변덕이 들었던 것일까. 부르주아의 세계로 완벽히 접어드는 그 순간, 부뒤는 다시 한번 물에 빠진다. 그렇게 하여 그는 마침내 자신을 익사로부터 구조해낸다. | 극장전 | 078 | 한국영상자료원 | 4/25
houellebecq
5.0
우리가 남을 위해 행사하는 용기, 친절과 같은 미덕들도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한 것. 추한 사람이든 지적인 사람이든 각자 돌아갈 자신만의 집이 있는데 그런 고향은 위에서 언급한 미덕들로 결코 변하지 않고 각자의 실존을 지탱한다. 벗어던져서 되찾을수있는 삶이라면야 오히려 무지가 미덕은 아닐지?
토끼나루
4.0
1. 부뒤는 정말 '그리스도'인가? (내내 의심을 가지고 보다가, 마지막, 십자가를 이고가는 모습) 2. 부뒤의 '움직임'은 근대와 현대의 일상 속에서 작동하기엔 너무 좁다. 마지막 풀숲에서의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밀실에서의 움직임을 비교해보라. '야만'은 누가 붙이는 말인가. 3. '오즈 야스지로'. 당신은 설마.. 4. '영화 안에서의' 음악을 기가 막히게 쓴다. 5. 누가 봐도 강간의 기운이 감도는 장면을, 즐거운 섹스로 변모시킨 쇼트의 진행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마저 장 르누아르의 비꼬움이었다면 모르겠지만..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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