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하가 통과하는 중국 남쪽의 한 마을에서 여성들이 강간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마을이 발칵 뒤집혀야 할 것 같은데 조용하다. 대신 주민들은 쑥덕쑥덕 귓속말로 떠들어댄다. 어떤 모리배 같은 남자는 사건을 해결하겠다며 피해 여성의 부모를 다그치기까지 한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 이 마을에는 전조처럼 안개가 자욱이 쌓인다. '안개'는 이 영화를 파악하는 열쇠다. <고요한 안개> 영화 제목대로 사건의 여파는 마을 전체에 안개처럼 퍼져나가고 이에 대해 주민들은 남의 일인 양 침묵하기 일쑤다. 영화의 카메라는 사건의 피해자를 따라다니며 목격자 역할을 하는가 하면 가해자가 일을 저지르는 순간에는 멀찍이 지켜보며 방관자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는 카메라는 종종 아무 일 없다는 듯 가해자 그리고 피해자와 마을 주민들이 교차하는 광경을 포착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카메라의 운동 속에서 사건의 고통은 온전히 피해자 몫이라는 경악할만한 사실을 소름 끼칠 만큼 고요하게 웅변한다. (허남웅)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