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환5.0냄새나는 부조리로 가득찬 세상 속에 이리저리 몽유하던 이들은 코끼리가 여전히 앉아있는 낙원을 꿈꾼다. 하룻밤의 잠은 오늘 하루를 견뎌낸 이들만이 취하는 선물이 아니라, 유일하게 현실의 문제들을 뒤로한 채 눈 감을 수 있는 도피처는 아니었을까.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들의 울음이 무슨 소용있을까. 울음이 그치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여전히 풀어야할 숙제들 역시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텐데.좋아요66댓글3
다솜땅3.5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이미 지나고 보면, 돌이킬 수 없는 것.. 그래서 이들이 도피한다. 코끼리에게로.. 하지만, 현실과의 괴리가 가득한 곳이 코끼리가 있는 곳.. 조금만.. 조금만 더 이따가 생각해 보기로 해!! #19.2.4 (148) #긴~ 러닝타임 영화좋아요64댓글0
JH5.0누군가의 아픔에 방관하는 사이, 그의 영혼은 죽어간다. 따뜻한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잿빛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이다. 다양한 군상을 보여주며 긴 러닝타임으로 개봉되길 고집했던 감독의 이유를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카메라가 인물을 따라다니면서 감정이 천천히 고도된다는 느낌을 받는데, 점점 어두워지는 기차역 뒷편에서의 롱테이크는 단연 압권이다.좋아요40댓글0
Gomiyuuu5.0소녀와 할아버지, 조직의 두목, 그리고 소년. 이 4명의 인물과 여러 주변인들은 각자의 도피길을 따라 서로 부딪히고 멀어짐을 반복한다. 소년의 가정에는 불화가 가득하고, 부모는 그에게 일말의 신뢰도 가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속에서 소년은 자신은 불량배의 휴대폰을 훔치지 않았다는 친구의 말만 믿는다. 소년은 친구를 감싸 주고자 학교의 불량배와 맞서지만, 실수로 불량배를 계단에서 밀어 의식불명으로 만들어버린다. 소년은 그저 상황을 도피하고자 한다. 그런 소년을 쫒는것은 불량배의 친형인 어느 지역조직의 두목이다. 그는 친구의 아내를 범하는데, 친구는 그것을 목격한 뒤 눈 앞에서 아파트 밑으로 떨어져 자살한다. 그는 그가 좋아하는 짝사랑의 대상에게, 자기 친구가 죽은 것은 너가 나를 만나주지 않았기 때문이라 구차하게 변명한다. 소년과 같은 건물의 사는 할아버지도 소년과 두목의 추적과정속에 얽히게 된다. 그의 자식들은 손녀의 교육을 위해 좋은 학군으로 이사가기를 바라는데, 그 발판으로 할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보내고자 한다. 그는 요양원에선 개를 키울 수 없다고 가족들에게 핑계를 되며 곤란한 상황을 늘 무마해 왔다. 그러나 어느날, 산책 도중 그의 조그마한 개는 큰 개에 물려 죽어버린다. 소년은 도피과정중, 소녀와 여러번 마주친다. 처음은 코끼리를 보러 먼 마을에 가자는 권유를 하기 위해서 였지만, 소녀는 코웃음을 치며 거절한다. 두번째 만남에서 소년은 소녀와 학교의 선생이 원조교제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소녀와 선생의 치부를 찍은 동영상은 이미 학급 채팅방에서 공유되고 있었고, 도망치듯 선생의 집을 빠져나간 그녀가 마주치는 것은 엄마와의 해묵은 갈등과, 선생의 무자비한 배신일 뿐이다. 그녀도 그렇게 코끼리에 대한 감각을 향한다. 수없이 산란하는 이야기들의 조각들은 4시간동안 뒤얽히고, 마침내 4명의 인물들은 모두 제각각의 코끼리를 꿈꾸게 된다. 마침내 할아버지와 그의 손녀, 소년, 소녀는 늦은 밤 버스를 타고, '그곳에 있을' 코끼리를 보기위해 여행을 떠난다. 여러 인물들이 마침내 하나의 목적으로 나아가며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과 함께, 멀리서 울려오는 코끼리 소리와 함께 영화는 끝이 난다. 이는 짐짓 희망의 메세지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생각해보면 막상 해결이 된 문제는 하나도 없다. 결국에는 이는 논리와 현실을 외면한, 이상과 감각으로의 도피극에 지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영화를 보고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흘러나오는 진실된 부끄러움의 감정 때문이며, 그들의 도피가 자살로써 표상되는 무로의 도피가 아닌, 어디까지나 유, 즉 현실존재의 영역 안에서의 발버둥이었기 때문이다. 실로 진실된 부끄러움은 통렬한 자기반성과 동의어이다. 위대한 근대성의 범주에 들지 못한 대다수의 우리. 그렇기에 짊게된 모든 비루한 짐들 중에서 오직 부끄러움만이 우리를 냉철하고 명료하게 바라보게 할수있다. 다시금 말하지만, 영화속의 거의 모든 인간상들은 소외로써 포장되면서도 그 내면의 추악함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인물들은 지나칠 정도로 서로의 탓을 하지만 스스로 성찰하며 진실된 부끄러움(이는 외부의 강제, 예를 들면 학교선생 부부를 향한 소녀의 폭력을 통해 실현되기도 한다)에 도달할 때도 분명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에서 이러한 감정의 변화 - 그것이 부끄러움이 되든, 되지못하든 - 는 순간 순간의 극단적인 분출로 표상된다는 것이다. 소녀는 원조교제의 원인을 오롯이 소녀의 '여우같은 음탕함' 에서 찾으려 하는 당사자 교사부부를 상대로 집밖으로 '도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집안에서 들려오는 도를 넘는 모욕적 발언들을 참지 못한 소녀는 돌연 아구방망이를 어디선가 들고 와 교사부부를 내리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위대했던 하나의 테이크, 후반부의 조직의 두목과 주인공 소년의 극적만남. 그곳에서 일어난 감정의 극단적인 변화들을 생각해보자. 화해와 용서라는 소년과 두목사이의 잔잔한 공기는 느닷 없이 총을 들고 소년을 구하러 온 그의 친구에 의해 산산조각 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초적 건맨이었던 친구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닫고는 돌연 가장 최악의 도피, 자살을 선택한다. 이러한 극단성은 수려한 롱테이크를 통해 미학적인 완성에 도달한다. 만약 이 모든 충동적으로 보이는 감정의 변화가 롱테이크가 아닌, 단순한 기술적 변화, 즉 순간순간 전환되는 짧은 씬들을 통해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주게 되었을까. 아마 이 모든 서사는 구차해진다. 스펙타클, 영화적 재미의 추구가 섞여버린 탁해진 공기속에서, 메세지는 쉽사리 땅에 닿지 못한다. 반면 후보가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정적이고 조심스러운 롱테이크들은 단순한 형식상의 일치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지만, 인물의 표정과 태도, 감정에 초점을 맞춘 신중한 관찰을 유도한다. 인물들의 순간순간들이 인생의 보편적 삽화가 되는 순간이다. 또한 롱테이크와 더불어 전개되는 섬세한 초점의 대비, 다양한 프레임들, 그리고 교감적인 클로즈업들을 통해 후보는 이런 극단적인 가변성 자체를 우리 본성을 이끄는 하나의 중요한 질료로써 격상시키는데 성공한다. 상영 전, 감독이 요절했다는 사실은 접했지만 이유를 굳이 찾아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화에서 끊임없이 스며나오는 후 보 자신의 나약한 천재의 초상이 안타까운 가능성 -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것 - 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부정하기란 힘든일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내 작은 휴대폰 액정속에서, 가능성은 현실이 되어있었다. 영화 상영중 나오던 관객들의 웃음들은 그렇기에 더욱 매정하게 들린다. 너무도 진지했던, 세상과 후보의 괴리가 담긴 장면들을 서스럼 없이 앞서 나가던 모종의 웃음들. 그 어긋난 주체야말로 어쩌면 나약한 천재와 자살, 이 두 낱말이 자연스럽게 결합되게 만든 이 세상의 냉소적 낙차가 아니었을까.좋아요35댓글0
이동진 평론가
4.0
놀랍고도 절실한 데뷔작을 유작으로 만나야 하는 안타까움.
정환
5.0
냄새나는 부조리로 가득찬 세상 속에 이리저리 몽유하던 이들은 코끼리가 여전히 앉아있는 낙원을 꿈꾼다. 하룻밤의 잠은 오늘 하루를 견뎌낸 이들만이 취하는 선물이 아니라, 유일하게 현실의 문제들을 뒤로한 채 눈 감을 수 있는 도피처는 아니었을까.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들의 울음이 무슨 소용있을까. 울음이 그치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여전히 풀어야할 숙제들 역시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텐데.
다솜땅
3.5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이미 지나고 보면, 돌이킬 수 없는 것.. 그래서 이들이 도피한다. 코끼리에게로.. 하지만, 현실과의 괴리가 가득한 곳이 코끼리가 있는 곳.. 조금만.. 조금만 더 이따가 생각해 보기로 해!! #19.2.4 (148) #긴~ 러닝타임 영화
Jay Oh
4.0
심도가 얕아 나밖에 안 보이는 이기적인 세상. 앉아만 있는 코끼리들은 이곳에도 있었어. A cry pierces the broken night.
Dh
3.5
역겨운 세상 속에서 역겹지 않은 곳을 찾아나서다 #움츠림 #소외 #운다
JH
5.0
누군가의 아픔에 방관하는 사이, 그의 영혼은 죽어간다. 따뜻한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잿빛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이다. 다양한 군상을 보여주며 긴 러닝타임으로 개봉되길 고집했던 감독의 이유를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카메라가 인물을 따라다니면서 감정이 천천히 고도된다는 느낌을 받는데, 점점 어두워지는 기차역 뒷편에서의 롱테이크는 단연 압권이다.
Gomiyuuu
5.0
소녀와 할아버지, 조직의 두목, 그리고 소년. 이 4명의 인물과 여러 주변인들은 각자의 도피길을 따라 서로 부딪히고 멀어짐을 반복한다. 소년의 가정에는 불화가 가득하고, 부모는 그에게 일말의 신뢰도 가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속에서 소년은 자신은 불량배의 휴대폰을 훔치지 않았다는 친구의 말만 믿는다. 소년은 친구를 감싸 주고자 학교의 불량배와 맞서지만, 실수로 불량배를 계단에서 밀어 의식불명으로 만들어버린다. 소년은 그저 상황을 도피하고자 한다. 그런 소년을 쫒는것은 불량배의 친형인 어느 지역조직의 두목이다. 그는 친구의 아내를 범하는데, 친구는 그것을 목격한 뒤 눈 앞에서 아파트 밑으로 떨어져 자살한다. 그는 그가 좋아하는 짝사랑의 대상에게, 자기 친구가 죽은 것은 너가 나를 만나주지 않았기 때문이라 구차하게 변명한다. 소년과 같은 건물의 사는 할아버지도 소년과 두목의 추적과정속에 얽히게 된다. 그의 자식들은 손녀의 교육을 위해 좋은 학군으로 이사가기를 바라는데, 그 발판으로 할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보내고자 한다. 그는 요양원에선 개를 키울 수 없다고 가족들에게 핑계를 되며 곤란한 상황을 늘 무마해 왔다. 그러나 어느날, 산책 도중 그의 조그마한 개는 큰 개에 물려 죽어버린다. 소년은 도피과정중, 소녀와 여러번 마주친다. 처음은 코끼리를 보러 먼 마을에 가자는 권유를 하기 위해서 였지만, 소녀는 코웃음을 치며 거절한다. 두번째 만남에서 소년은 소녀와 학교의 선생이 원조교제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소녀와 선생의 치부를 찍은 동영상은 이미 학급 채팅방에서 공유되고 있었고, 도망치듯 선생의 집을 빠져나간 그녀가 마주치는 것은 엄마와의 해묵은 갈등과, 선생의 무자비한 배신일 뿐이다. 그녀도 그렇게 코끼리에 대한 감각을 향한다. 수없이 산란하는 이야기들의 조각들은 4시간동안 뒤얽히고, 마침내 4명의 인물들은 모두 제각각의 코끼리를 꿈꾸게 된다. 마침내 할아버지와 그의 손녀, 소년, 소녀는 늦은 밤 버스를 타고, '그곳에 있을' 코끼리를 보기위해 여행을 떠난다. 여러 인물들이 마침내 하나의 목적으로 나아가며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과 함께, 멀리서 울려오는 코끼리 소리와 함께 영화는 끝이 난다. 이는 짐짓 희망의 메세지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생각해보면 막상 해결이 된 문제는 하나도 없다. 결국에는 이는 논리와 현실을 외면한, 이상과 감각으로의 도피극에 지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영화를 보고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흘러나오는 진실된 부끄러움의 감정 때문이며, 그들의 도피가 자살로써 표상되는 무로의 도피가 아닌, 어디까지나 유, 즉 현실존재의 영역 안에서의 발버둥이었기 때문이다. 실로 진실된 부끄러움은 통렬한 자기반성과 동의어이다. 위대한 근대성의 범주에 들지 못한 대다수의 우리. 그렇기에 짊게된 모든 비루한 짐들 중에서 오직 부끄러움만이 우리를 냉철하고 명료하게 바라보게 할수있다. 다시금 말하지만, 영화속의 거의 모든 인간상들은 소외로써 포장되면서도 그 내면의 추악함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인물들은 지나칠 정도로 서로의 탓을 하지만 스스로 성찰하며 진실된 부끄러움(이는 외부의 강제, 예를 들면 학교선생 부부를 향한 소녀의 폭력을 통해 실현되기도 한다)에 도달할 때도 분명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에서 이러한 감정의 변화 - 그것이 부끄러움이 되든, 되지못하든 - 는 순간 순간의 극단적인 분출로 표상된다는 것이다. 소녀는 원조교제의 원인을 오롯이 소녀의 '여우같은 음탕함' 에서 찾으려 하는 당사자 교사부부를 상대로 집밖으로 '도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집안에서 들려오는 도를 넘는 모욕적 발언들을 참지 못한 소녀는 돌연 아구방망이를 어디선가 들고 와 교사부부를 내리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위대했던 하나의 테이크, 후반부의 조직의 두목과 주인공 소년의 극적만남. 그곳에서 일어난 감정의 극단적인 변화들을 생각해보자. 화해와 용서라는 소년과 두목사이의 잔잔한 공기는 느닷 없이 총을 들고 소년을 구하러 온 그의 친구에 의해 산산조각 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초적 건맨이었던 친구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닫고는 돌연 가장 최악의 도피, 자살을 선택한다. 이러한 극단성은 수려한 롱테이크를 통해 미학적인 완성에 도달한다. 만약 이 모든 충동적으로 보이는 감정의 변화가 롱테이크가 아닌, 단순한 기술적 변화, 즉 순간순간 전환되는 짧은 씬들을 통해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주게 되었을까. 아마 이 모든 서사는 구차해진다. 스펙타클, 영화적 재미의 추구가 섞여버린 탁해진 공기속에서, 메세지는 쉽사리 땅에 닿지 못한다. 반면 후보가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정적이고 조심스러운 롱테이크들은 단순한 형식상의 일치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지만, 인물의 표정과 태도, 감정에 초점을 맞춘 신중한 관찰을 유도한다. 인물들의 순간순간들이 인생의 보편적 삽화가 되는 순간이다. 또한 롱테이크와 더불어 전개되는 섬세한 초점의 대비, 다양한 프레임들, 그리고 교감적인 클로즈업들을 통해 후보는 이런 극단적인 가변성 자체를 우리 본성을 이끄는 하나의 중요한 질료로써 격상시키는데 성공한다. 상영 전, 감독이 요절했다는 사실은 접했지만 이유를 굳이 찾아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화에서 끊임없이 스며나오는 후 보 자신의 나약한 천재의 초상이 안타까운 가능성 -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것 - 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부정하기란 힘든일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내 작은 휴대폰 액정속에서, 가능성은 현실이 되어있었다. 영화 상영중 나오던 관객들의 웃음들은 그렇기에 더욱 매정하게 들린다. 너무도 진지했던, 세상과 후보의 괴리가 담긴 장면들을 서스럼 없이 앞서 나가던 모종의 웃음들. 그 어긋난 주체야말로 어쩌면 나약한 천재와 자살, 이 두 낱말이 자연스럽게 결합되게 만든 이 세상의 냉소적 낙차가 아니었을까.
배 윤 서
4.0
쓸모도 없고, 희망도 없어보이는 삶의 막장에도 코끼리는 오늘도 운다. 거기에 앉아 운다. 책임없는 현재가 아닌 과거와 미래에 닿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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